햇빛 좀 가리지 마라디오게네스
햇빛 좀 가리지 마라디오게네스
복권을 사본 적 있는가. 가챠 게임에서 SSR 캐릭터를 뽑으려고 과금한 적은? 아니면 친구들과 보드게임을 하다가 "왜 나만 맨날 1이 나오지?"라고 투덜거린 적은?
우리는 이럴 때 "운이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잠깐 생각해 보자. 운이란 대체 뭘까? 주사위는 감정이 없다. 당신을 미워하지도, 좋아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왜 어떤 숫자는 잘 나오고, 어떤 숫자는 안 나올까?
약 500년 전, 이 질문에 진지하게 달려든 사람이 있었다. 놀랍게도 그는 대학 교수도, 철학자도 아니었다. 직업은 의사였고, 취미는 도박이었다. 이름은 지롤라모 카르다노. 이 사람은 도박판에서 돈을 잃으면서,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확률'이라는 개념을 수학으로 정리했다.
그의 이야기는 영화보다 드라마틱하다.
1501년, 이탈리아 파비아. 카르다노는 사생아로 태어났다. 아버지 파치오 카르다노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친구이자 법률가였지만, 어머니와 정식 결혼은 하지 않았다. 당시 사생아는 사회적으로 큰 낙인이었다. 출발선부터 불리했다.
설상가상으로, 카르다노는 어린 시절 페스트(흑사병)에 걸렸다. 그 시대에 페스트는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그는 살아남았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운명이 나를 죽이려 했지만 실패했다."
살아남은 카르다노는 의학을 공부해 의사가 되었다. 실력은 뛰어났다. 유럽 각지에서 환자가 찾아올 정도였고, 스코틀랜드 대주교의 천식을 치료해 명성을 떨치기도 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 있었다.
도박이었다.
카르다노는 주사위, 카드, 체스 — 돈을 걸 수 있는 게임이라면 뭐든 했다. 그것도 매일. 자서전에서 그는 이렇게 고백했다. "25년 동안 거의 매일 도박을 했다. 이것은 나의 가장 큰 수치다." 의사로 번 돈을 도박판에서 날리고, 가족이 곤궁에 빠지기도 했다.
그런데 여기서 반전이 일어난다. 보통 도박 중독자는 돈만 잃고 끝난다. 하지만 카르다노는 달랐다. 그는 돈을 잃으면서 "왜 지는지"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감정이 아니라 숫자로.
카르다노는 도박 경험을 바탕으로 한 권의 책을 썼다. 라틴어 제목은 Liber de Ludo Aleae, 우리말로 하면 《우연의 게임에 관한 책》이다. 1564년경에 쓴 것으로 추정되지만, 출판은 그가 죽은 뒤인 1663년에야 이루어졌다.
이 책에서 카르다노는 아주 단순한 질문을 던진다.
"주사위 하나를 던지면 6이 나올 가능성은 얼마인가?"
오늘날 우리는 이 답을 안다. 6분의 1. 약 16.7%. 하지만 1500년대에는 이런 생각 자체가 혁명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주사위의 결과를 신의 뜻이나 운명으로 여겼다. "숫자로 계산할 수 있다"는 발상 자체가 파격이었다.
카르다노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주사위 두 개를 동시에 던지면?
여기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해보자. 주사위 두 개를 던져서 나오는 눈의 합이 7이 될 확률과, 합이 12가 될 확률은 같을까? 직감적으로는 "글쎄,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카르다노는 경우의 수를 일일이 세어보았다.
합이 7이 되는 조합: (1,6), (2,5), (3,4), (4,3), (5,2), (6,1) → 6가지.
합이 12가 되는 조합: (6,6) → 딱 1가지.
주사위 두 개의 전체 경우의 수는 36가지다. 그러니까 합이 7이 나올 확률은 6/36, 약 16.7%. 합이 12가 나올 확률은 1/36, 약 2.8%. 무려 6배 차이다!
이걸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이 도박판에서 만나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아는 사람이 이긴다. 카르다노가 한 일은 바로 이것이다. "운"이라는 안개 속에 숨어 있던 규칙을 숫자로 끄집어낸 것.
비유를 하나 들어보겠다. 당신이 눈을 가리고 과녁에 다트를 던진다고 상상해 보자. 한 번 던져서 정중앙에 맞힐 수도 있다. 하지만 100번, 1000번 던지면? 다트는 과녁 전체에 골고루 퍼질 것이다. 한 번의 결과는 예측할 수 없지만, 수많은 시행이 모이면 패턴이 나타난다. 카르다노는 이 패턴을 처음으로 수학의 언어로 기록한 사람이다.
이것이 바로 확률의 핵심이다. 한 번의 주사위 던지기는 예측할 수 없다. 하지만 충분히 많이 던지면, 각 숫자는 거의 정확히 6분의 1씩 나온다. 카르다노는 이걸 "공정한 주사위의 기본 원리"라고 불렀다.
카르다노의 업적은 확률에서 끝나지 않는다. 사실 수학사에서 그의 이름이 가장 유명한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삼차방정식의 풀이법이다.
삼차방정식이 뭐냐고? 쉽게 말하자. 중학교에서 배우는 방정식을 떠올려 보자. x + 3 = 7, 이런 것은 일차방정식이다. x² + 2x + 1 = 0, 이런 것은 이차방정식이다. 그럼 삼차방정식은? x³이 들어가는 방정식이다.
이차방정식의 풀이법(근의 공식)은 이미 고대부터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삼차방정식은? 1500년 넘게 아무도 풀지 못했다. 수학계의 에베레스트 같은 존재였다.
1530년대, 이탈리아의 수학자 니콜로 타르탈리아가 마침내 삼차방정식의 풀이법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는 이걸 비밀로 지켰다. 당시 수학자들은 "수학 결투"라는 것을 했다. 서로 문제를 내고, 더 많이 푸는 쪽이 이기는 대결이다. 삼차방정식 풀이법은 결투에서 무적이 되는 비밀 무기였던 셈이다.
카르다노는 타르탈리아에게 접근했다. "제발 풀이법을 알려달라. 절대 출판하지 않겠다고 맹세한다." 타르탈리아는 고민 끝에 풀이법을 알려주었다. 카르다노가 맹세까지 했으니까.
그런데 카르다노는 그 풀이법을 1545년 자신의 책 *아르스 마그나(Ars Magna, 위대한 기술)*에 실어버렸다.
배신? 카르다노의 변명은 이랬다. "타르탈리아보다 먼저 다른 수학자(델 페로)가 이미 풀이법을 발견했다는 증거를 찾았다. 그러니 타르탈리아의 독점적 비밀이 아니다." 논리적으로는 일리가 있었지만, 타르탈리아는 분노했고 두 사람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오늘날 이 풀이법은 '카르다노의 공식'이라고 불린다. 타르탈리아 입장에서는 억울하겠지만, 역사는 출판한 사람의 이름을 기억했다.
이 에피소드가 왜 중요할까? 삼차방정식의 해법은 단순히 "어려운 문제 하나를 풀었다"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전까지 수학은 눈에 보이는 것만 다뤘다. 길이, 넓이, 부피. 그런데 삼차방정식을 풀다 보면, 음수의 제곱근 — 그러니까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수가 중간 계산에 튀어나온다. 카르다노는 이걸 "쓸모없는 미묘한 것"이라고 불렀지만, 계산에는 사용했다.
이 "쓸모없는 수"가 나중에 허수(imaginary number)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리고 허수는 오늘날 전자공학, 양자역학, 신호처리의 핵심 도구가 되었다. 카르다노가 "쓸모없다"고 한 것이 현대 문명의 기둥 중 하나가 된 셈이다.
카르다노가 주사위판에서 시작한 확률의 씨앗은 오늘날 우리 일상 곳곳에서 자라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 날씨 앱을 켠다. "오늘 비 올 확률 70%." 이 숫자가 카르다노가 시작한 확률론의 후손이다. 기상청은 과거 데이터를 분석해서 "오늘과 비슷한 조건에서 비가 온 비율"을 계산한다. 주사위의 경우의 수를 세는 것과 본질적으로 같다.
보험에 가입한다. 보험회사는 어떻게 보험료를 정할까? "당신 나이, 성별, 직업의 사람이 사고를 당할 확률"을 계산한다. 확률이 높으면 보험료가 올라가고, 낮으면 내려간다. 카르다노의 주사위 계산이 수백 년을 거쳐 보험 산업이 된 것이다.
넷플릭스나 유튜브의 추천 알고리즘은? "이 사용자가 이 영상을 좋아할 확률"을 계산한다. 가챠 게임의 SSR 확률 1%는? 카르다노가 정리한 "전체 경우의 수 대비 원하는 경우의 수" 공식 그대로다.
심지어 인공지능도 확률 위에 서 있다. AI가 "이 사진은 고양이일 확률 94%"라고 판단하는 것도, 거슬러 올라가면 카르다노의 주사위에 닿는다.
재미있는 건 카르다노 본인의 인생이다. 그는 점성술도 믿었다. 자기 죽음의 날짜까지 점성술로 예측했다. 1576년 9월 21일에 죽을 것이라고. 그리고 그날 정말 죽었다. 물론 후대 학자들은 "예측이 맞도록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 아니냐"고 의심한다. 확률론을 만든 사람이 점성술을 믿었다니,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모순적인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카르다노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었다. 도박 중독자였고, 약속을 어기기도 했고, 미신을 믿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인류에게 결정적인 선물 하나를 남겼다.
"운명은 계산할 수 있다."
다음에 복권을 살 때, 가챠를 돌릴 때, 비 올 확률을 확인할 때 기억해 주길 바란다. 그 숫자 뒤에는 500년 전, 도박판에서 돈을 잃으며 연필을 꺼내 든 한 이탈리아 의사가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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