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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1770년 어느 일요일, 밀티츠 남작은 교회에 늦었다.
그 지각이 독일 철학사의 경로를 틀어놓을 줄은 아무도 몰랐다.
작센의 작은 마을 라메나우에서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는 거위를 몰며 자랐다.
아버지는 가난한 직조공이었고, 학교는 먼 이야기였다.
그날 예배가 끝난 뒤, 마을 사람들이 남작에게 말을 걸었다.
"저 소년이 설교를 통째로 외우고 있었습니다."
남작은 여덟 살짜리 아이를 불러 세웠고, 소년은 방금 끝난 설교를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완벽하게 다시 읊었다.
남작은 그 자리에서 교육비 후원을 결정했다.
면접장 대기실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이 전혀 다른 회사를 소개해준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단, 이쪽은 귀족의 지각 덕분이었다.
남작이 5분만 일찍 도착했다면, 피히테는 평생 거위를 몰았을 것이다.


피히테를 하룻밤 사이에 유명하게 만든 건 그의 이름이 아니었다.
책에서 빠져 있던 그의 이름이었다.
1792년, 피히테는 『모든 계시의 비판 시도』를 출판했다.
칸트의 철학을 종교 문제에 적용한 이 책은, 출판사 실수로 저자명과 서문이 빠진 채 세상에 나왔다.
당시 학계는 칸트의 종교 저작을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칸트는 당대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로, 그의 새 책이라면 학자들이 앞다퉈 구입하던 시절이었다.
책을 받아든 학자들은 "칸트가 드디어 냈구나"라고 확신했다.
그러자 칸트 본인이 직접 나섰다.
"이건 내 책이 아닙니다. 피히테라는 청년이 쓴 겁니다."
그 한 마디로 피히테는 무명에서 유명 철학자가 되었다.
신입사원이 쓴 보고서를 팀장 작품으로 착각했다가, 진짜 저자가 밝혀진 순간이었다.
스승을 너무 잘 모방한 것이 역설적으로 독립의 계기가 되었다.


피히테는 사직서를 위협용으로 꺼냈다.
예나 대학은 그것을 감사히 수리했다.
1798년, 피히테는 학술지에 실린 글에서 "도덕적 세계 질서 자체가 신"이라는 논변을 폈다.
신을 교회 밖에서 정의하려는 시도였다.
그러자 이것이 곧 '무신론 논쟁'으로 폭발했다. 신을 부정했다는 비난이었다.
작센 선제후가 학술지 압수를 명령했고, 예나 대학은 피히테에게 공개 사과를 요구했다.
피히테는 맞섰다.
"학문의 자유를 양보하느니 자리를 내놓겠습니다."
그는 대학이 자신을 붙잡을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대학 측의 대답은 달랐다.
"네, 알겠습니다."
블러핑이 실패한 것이다.
회사에서 부당한 지시를 거부하며 "그러면 저 그만두겠습니다"라고 했을 때, 예상과 달리 담담한 "수고하셨습니다"를 들은 허탈함이었다.
피히테는 교수직을 잃고 베를린으로 떠났다.


강의실 창밖으로 프랑스군의 군화 소리가 들려왔다.
피히테는 원고를 넘겼다.
1806년, 나폴레옹의 군대가 베를린을 점령했다.
당시 유럽에서 나폴레옹은 무적이었고, 프로이센 군대는 한 달도 안 되어 무너졌다.
점령된 도시에서 프랑스어가 들리는 건 일상이 되었다.
그 겨울, 피히테는 베를린 학술원 강당에 섰다.
1807년부터 1808년까지 14번에 걸쳐 『독일 국민에게 고함』을 연설했다.
강연장 밖에서는 프랑스 군인들의 훈련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독일 사람들에게 말했다.
"우리가 진 건 전쟁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을 잃어버린 겁니다."
교육을 통해 국민이 스스로를 세워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밖에서 경보가 울리는데 마이크를 내려놓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경보는 결국 그에게도 닿았다.
1814년, 피히테의 아내 요한나는 나폴레옹 전쟁에서 부상당한 병사들을 간호하다 발진티푸스에 감염됐다.
발진티푸스는 당시 군인들 사이에 퍼지던 전염병이었다.
피히테는 아내를 간병하다 자신도 감염되었고, 5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점령군 앞에서 저항을 설파한 철학자가, 결국 그 전쟁이 남긴 부상병들의 질병으로 쓰러졌다.
연설대가 아니라 병상에서였다.
거위치기 소년은, 끝까지 원고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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