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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타고르는 1901년 산티니케탄에 아쉬람과 실험학교를 세웠어요. 등수를 매기는 교실 대신 자연과 예술 곁에서 아이가 스스로 자라게 하려던 배움터였고, 이 실험이 자라 1921년 비스바-바라티 대학이 됐어요.
라빈드라나트 타고르(1861년부터 1941년까지)는 인도 벵골에서 태어나, 1913년 아시아 사람으로는 처음 노벨문학상을 받은 시인이에요.
그런데 그는 시만 쓰지 않았어요.
마흔 살 무렵인 1901년, 타고르는 번잡한 도시 콜카타를 떠나 산티니케탄이라는 시골로 옮겨 가 아쉬람(수행하며 함께 사는 공동체)과 작은 실험학교를 세웠어요.
산티니케탄은 '평화의 거처'라는 뜻으로 알려져 있어요.
왜 하필 학교였을까요.
그 무렵 인도 아이들이 다니던 학교는 대개 딱딱한 교실에 앉아 교과서를 외우고 시험으로 등수를 매기는 곳이었어요.
타고르는 이런 틀에 박힌 배움과는 다른 길을 찾고 싶어 했어요.
그래서 '한번 다르게 해 보자'며 문을 연 곳이 산티니케탄 학교예요.
평화가 깃든 시골에서 배움 자체를 다시 실험해 본 거죠.
'실험학교'라고 하면 과학실을 떠올리기 쉽지만, 여기서 실험은 '배우는 방식 자체를 새로 시도했다'는 뜻이에요.
요리에 비유하면, 남이 준 조리법을 그대로 따라 하지 않고 재료와 불을 바꿔 가며 더 나은 방법을 찾아보는 것과 비슷해요.
타고르의 생각을 알면 이 학교가 왜 그런 모습이었는지 이해하기 쉬워요.
그의 사상은 고대 인도의 『우파니샤드』에 뿌리를 두고 있어요.
사람과 신, 나와 세상이 둘이 아니라 하나이고, 나와 만물이 서로 스며든다는 마음을 담고 있었죠.
이런 사람에게 자연은 교과서 밖의 딱딱한 대상이 아니라 함께 숨 쉬는 배움의 짝이었죠.
그래서 산티니케탄의 배움은 생명을 긍정하고 예찬하던 그의 시심과 나란히 흘러갔어요.
작게 시작한 학교는 점점 자라 대학이 됐어요.
1918년 12월 24일 비스바-바라티(Visva-Bharati) 대학의 초석이 놓였고, 정확히 3년 뒤인 1921년 12월 24일에 문을 열었어요.
타고르가 이 대학에 담고 싶었던 꿈은 '세계를 한자리에 모으는 배움'이었어요.
1932년 이란을 찾았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어요.
아시아의 각 나라는 저마다의 힘과 본성과 필요에 따라 자기 문제를 풀어가지만, 각자가 밝히는 등불은 결국 하나로 모여 지식이라는 공통의 빛을 비춘다고요.
여러 촛불을 한 방에 모으면 방 전체가 환해지듯, 동양과 서양, 여러 나라의 앎을 한자리에 모아 서로 배우게 하려던 거예요.
타고르의 실험은 교실 안에만 머물지 않았어요.
1921년, 그는 영국인 농업경제학자 레너드 엘름허스트와 함께 '농촌재건연구소'를 세웠는데, 이곳이 훗날 슈리니케탄이 돼요.
이 연구소는 가까운 마을 사람들이 농사를 더 잘 짓고 살림을 스스로 일으키도록 돕는 곳이었어요.
배움이 학생만의 것이 아니라 마을 어른과 농부에게도 필요하다고 본 거죠.
공부방을 넓혀 동네 전체를 배움터로 삼은 셈이에요.
산티니케탄 실험은 '학교가 꼭 이래야 한다'는 틀을 흔든 시도였어요.
등수와 시험 대신 자연과 예술, 그리고 세계를 향한 호기심을 배움의 한가운데에 둔 거죠.
오늘날 자연 속 체험학습이나 여러 나라 문화를 함께 배우는 국제 교육을 떠올리면, 백 년 전 한 시인이 시골 마을에서 먼저 해 본 실험이 그리 낯설지 않게 다가와요.
타고르는 1901년 산티니케탄에 아쉬람과 실험학교를 세웠고, 이 학교는 1918년 초석을 놓아 1921년 비스바-바라티 대학으로 자랐어요.
사람과 자연, 나와 세상이 둘이 아니라는 그의 생각이 배움의 바탕이었고, 1921년 세운 농촌재건연구소(훗날 슈리니케탄)로 마을까지 품었죠.
시험 점수가 아니라 생명과 세계를 향한 마음을 키우려 한 배움, 그것이 산티니케탄 교육실험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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