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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수운 최제우는 1864년 조정이 동학을 천주교(서학)와 혼동해 처형했지만, 스승을 잃은 제자들이 불태워진 글을 다시 모아 책으로 펴내면서 동학은 오히려 더 넓게 퍼졌어요.
최제우(1824년부터 1864년까지)는 경주에서 '동학(東學)'을 세운 사람이고, 호가 '수운(水雲)'이에요.
여기서는 그가 어떻게 죽었고, 그 죽음 뒤에 동학이 어떻게 퍼졌는지만 좁게 이야기할게요.
1861년 음력 6월부터 관에서 그를 눈여겨보기 시작했어요.
이유는 그를 '서학(西學)', 곧 천주교와 한패로 봤기 때문이에요.
위험을 느낀 그는 전라도로 피했다가, 1863년 음력 12월에 결국 붙잡혔어요.
이듬해 1864년 4월 5일 유죄 판결을 받고, 4월 15일(음력 3월 10일) 대구 경상감영 관덕정(觀德亭) 앞에서 참형을 당했어요.
목이 잘린 거예요.
그때 나이가 마흔한 살이었죠.
죄목은 자료마다 조금 달라요.
한국어 기록은 '좌도난정지율(左道亂正之律)', 곧 '그릇된 도로 바른 세상을 어지럽힌 죄'라고 하고, 중국어 기록은 경상도 관찰사 서헌순(徐憲淳)이 '혹세무민지죄(惑世誣民之罪)', 곧 '세상을 홀리고 백성을 속인 죄'로 처형했다고 해요.
표현은 달라도 속뜻은 하나예요.
"나라가 정한 바른 가르침이 아니다"라는 거죠.
먼저 오해 하나를 풀어야 해요.
수운은 사실 천주교에 반대하는 쪽이었어요.
그런데도 조정은 동학을 천주교와 한 덩어리로 착각해 함께 탄압했어요.
관변 문서에는 "동학이라는 것은 서학의 방법을 그대로 이어받고 이름만 바꿔 무지한 귀를 홀린다"는 식으로 적혀 있어요.
억울하게도 그의 죽음은 천주교를 퍼뜨려서가 아니라, 정부가 두 가지를 헷갈린 탓이었던 거예요.
그럼 왜 그렇게 위험하게 봤을까요.
크게 두 가지로 풀이돼요.
첫째, 하늘 같은 유일한 신을 섬기는 사람은 임금의 명령보다 신의 뜻을 앞세울 수 있어서, 임금을 꼭대기에 둔 유교 질서가 흔들릴까 봐 겁냈어요.
둘째, 동학이든 천주교든 나라가 관리할 수 없는 모임과 의례를 열었고, 조선에 낯선 '종교의 자유'라는 생각을 들여왔어요.
학교로 치면 교장 허락 없이 아이들이 몰래 큰 모임을 만든 셈이라, 윗사람들이 불안해한 거예요.
수운은 자기 죽음을 예감했어요.
그래서 붙잡히기 전인 1863년 음력 8월 14일(양력 9월 26일), 먼 친척이자 수제자였던 최시형(崔時亨, 호 해월, 1827년부터 1898년까지)에게 교주 자리를 미리 넘겼어요.
이게 결정적이었어요.
지도자가 갑자기 사라져도 뒤를 이을 사람이 정해져 있었으니까요.
게다가 붙잡힐 무렵 동학은 이미 뿌리를 꽤 내린 상태였어요.
신도 수는 수백 명에서 수만 명까지로 추산되고, 열두 곳이 넘는 마을과 고을에 조직이 있었어요.
1862년에는 각 지역을 맡는 우두머리인 접주(接主)를 열여섯 명이나 세웠고요.
씨앗이 여러 밭에 이미 뿌려져 있었던 거죠.
수운이 죽자 그의 글은 금서로 지정돼 불태워졌어요.
보통은 여기서 가르침도 사라지기 쉬워요.
그런데 최시형이 흩어지고 타 버린 글을 오랜 시간 다시 모았어요.
그렇게 한문 산문집 《동경대전(東經大全)》을 1880년 강원도 인제에서 펴냈고, 1883년 2월에는 충청도 목천에서 1000부를 다시 찍었어요.
한글 가사집 《용담유사(龍潭遺詞)》도 1881년 7월 충청도 단양에서 냈고요.
특히 한글 저술이 큰 힘이었어요.
수운은 처음부터 외우기 쉬운 4음보 가사체 한글로 글을 지었어요.
그래서 한자를 모르는 평민과 여성들 사이에서 노래처럼 입에서 입으로 번졌죠.
어려운 한문 경전만 있었다면 학자들 책상에서 멈췄겠지만, 쉬운 한글 노래였기에 시골 마을까지 흘러간 거예요.
오랜 세월이 지나 1907년 순종 때, 나라는 마침내 그의 죄를 공식으로 풀어 줬어요.
흔히 동학을 처음부터 '반봉건 정치 운동'으로 오해해요.
하지만 학자 수전 신에 따르면 수운의 꿈은 정치 강령이 아니라 종교적인 것이었어요.
동포에게 전통의 가치를 되살릴 힘이 있음을 일깨우려 한 거죠.
1862년 경상도 농민봉기도 시기만 겹칠 뿐, 자세히 보면 지방관의 부패에 맞선 것이지 동학과 직접 이어지진 않았다고 봐요.
순교 자체는 정치 반란의 처벌이 아니라, 낯선 믿음에 대한 오해와 두려움이 낳은 사건이었어요.
수운의 순교와 동학의 확산은 이렇게 기억하면 돼요.
조정은 동학을 천주교와 헷갈려 1864년 대구에서 그를 참형했고, 죄목은 기록마다 '좌도난정지율'과 '혹세무민지죄'로 갈려요.
하지만 그는 죽기 전 최시형에게 자리를 넘겼고, 이미 접주 조직과 쉬운 한글 노래가 밭에 뿌려져 있었어요.
그래서 스승이 죽고 글이 불탄 뒤에도 제자가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로 다시 모아 펴내며 동학은 더 멀리 퍼졌어요.
지도자를 없애면 가르침이 끝날 줄 알았지만, 오히려 이어질 준비가 되어 있던 셈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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