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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시천주 조화정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 안에 한울님을 모시고 있고(시천주), 저절로 그러한 우주의 흐름에 나를 맞춰 하나가 된다(조화정)'는 뜻이에요. 신이 하늘 저 멀리에 있는 게 아니라 내 마음 안에 이미 함께 있다고 본 거예요.
최제우(1824~1864)는 조선 후기에 동학을 만든 사람이에요.
호는 수운(水雲)이라고 해요.
1860년 음력 4월, 그는 경주 구미산 용담정에서 한울님(천주)과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는 종교 체험을 하고, 그 자리에서 외울 주문을 받았다고 전해져요.
이 체험 뒤에 그가 세상에 내놓은 가르침의 핵심을 한마디로 줄인 말이 바로 '시천주 조화정'이에요.
말이 어려워 보이지만 뜻은 뜻밖에 따뜻해요.
'한울님을 모신다'는 거예요.
여기서 '모신다'는 말을 그냥 상상해 보세요.
귀한 손님을 집에 모시면 우리는 그분을 함부로 대하지 않고 정성껏 대접하죠.
그런데 수운이 말한 손님은 남의 집이 아니라 바로 내 마음 안에 이미 들어와 계신 분이에요.
하늘 꼭대기에 앉아 사람을 내려다보는 신이 아니라, 나와 한집에 사는 신인 셈이죠.
'시천주(侍天主)'를 한 글자씩 풀어 볼게요.
侍는 '모실 시', 天主는 '한울님'이에요.
그대로 옮기면 '한울님을 모신다'가 되죠.
핵심은 이 모심이 특별한 사람만의 일이 아니라는 데 있어요.
임금이든 노비든, 남자든 여자든, 한자를 아는 선비든 글을 모르는 아낙이든,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자기 안에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고 본 거예요.
이걸 밥그릇으로 비유해 볼게요.
겉모습은 낡은 그릇도 있고 반짝이는 그릇도 있지만, 그 안에 담긴 밥은 똑같이 귀하죠.
사람의 겉모습이나 신분은 제각각이어도 그 속에 모신 한울님은 다르지 않다는 거예요.
그래서 나를 낮추어 볼 이유도, 남을 함부로 대할 이유도 없어져요.
실제로 수운의 주문 수행은 처음엔 몸의 병을 낫게 하는 데서 시작했지만, 나중에는 '한울님이 순간순간 내 안에 함께 계신다'는 자각을 얻는 쪽으로 깊어졌다고 해요.
결국 시천주는 '내 안을 들여다보면 거기 이미 한울님이 계신다'는 깨달음인 셈이에요.
'조화정(造化定)'은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해요.
造化(지을 조, 될 화)는 억지로 만드는 게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되어 가는 우주의 이치를 말해요.
봄이 오면 꽃이 피고, 가을이 오면 잎이 지는 것처럼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돌아가는 흐름이죠.
定은 '정할 정', 그 흐름 속에 내 자리를 정해 안정된다는 뜻이에요.
강물에 몸을 맡기고 헤엄쳐 본 적 있나요?
물살을 거슬러 발버둥 치면 금세 지치지만, 흐름에 몸을 실으면 훨씬 멀리 편하게 나아가죠.
조화정도 비슷해요.
내 안에 모신 한울님을 알아차리고 나면, 그 한울님이 움직이는 자연스러운 이치에 나를 맞추게 돼요.
억지와 욕심으로 세상을 뒤틀려 하지 않고, 저절로 그러한 흐름과 하나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 시천주와 조화정은 따로 노는 말이 아니라 이어져 있어요.
안에 계신 한울님을 모신다는 걸 깨닫고(시천주), 그 뜻대로 우주의 조화에 나를 맞춰 마음이 자리 잡는 것(조화정)이죠.
많은 사람들이 신이라고 하면 하늘 위 어딘가에서 상을 주고 벌을 내리는 존재를 떠올려요.
수운이 말한 한울님은 그런 그림과 결이 좀 달라요.
표로 견주어 볼게요.
| 흔히 떠올리는 신 | 시천주의 한울님 |
|---|---|
| 하늘 저 멀리 바깥에 있음 | 내 마음 안에 이미 모셔져 있음 |
| 특별한 사람만 가까이 감 |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모시고 있음 |
| 명령하고 심판함 | 순간순간 함께하며 자각하게 함 |
이렇게 보면 시천주 조화정이 왜 당시 사람들에게 큰 위로가 됐는지 짐작이 가요.
신분이 낮아 과거도 볼 수 없던 사람, 글을 몰라 경전을 읽지 못하던 사람도 '내 안에 한울님이 계신다'는 한마디에 자기 존재의 무게를 새로 느낄 수 있었으니까요.
멀리 빌러 갈 필요 없이, 내 안을 정성껏 들여다보는 데서 신앙이 시작된 거예요.
시천주 조화정은 어려운 주문 같지만 뜻은 단순해요.
시천주(侍天主)는 '누구나 자기 안에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는 깨달음이고, 조화정(造化定)은 '그 한울님이 움직이는 저절로 그러한 흐름에 나를 맞춰 하나가 된다'는 거예요.
신을 하늘 밖에서 찾지 않고 내 마음 안에서 모신다는 점, 그리고 그 모심에 신분과 배움의 차이가 없다는 점이 이 가르침의 심장이에요.
오늘 우리가 이 말을 기억한다면 이렇게 새길 수 있어요.
귀한 것은 멀리 있지 않고, 이미 내 안에 모셔져 있다는 것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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