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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최제우는 천주교인 '서학'을 유교·불교·도교와 함께 부족하다고 보았고, 자신의 가르침을 서양에서 온 배움이 아니라 동쪽 우리 땅에서 난 '동학(東學)'이라 이름 지어 서학과 분명히 갈라놓았어요. 이름 자체가 곧 동학의 정체성 선언이었죠.
조선 후기, 서쪽 바다 건너에서 낯선 가르침 하나가 들어와요.
바로 천주교, 당시 말로 '서학(西學)'이에요.
서쪽 서(西)에 배울 학(學), 말 그대로 '서양에서 온 배움'이라는 뜻이죠.
최제우(崔濟愚, 1824~1864, 호는 수운)는 스물한 살부터 서른한 살까지 약 10년간 장삿길로 전국을 떠돌며 유교·불교·도교는 물론 서학까지 온갖 사상을 직접 겪어 봤어요.
그러면서 그는 서학이 조선 사람의 삶과 잘 맞지 않는다고 느꼈어요.
마치 남의 나라 옷을 그대로 입은 것처럼, 서양 땅에서 나온 가르침을 우리 땅 사람들에게 그대로 입히는 건 어딘가 어긋난다고 본 거예요.
그래서 그는 서학에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했어요.
최제우가 자기 가르침에 붙인 이름이 '동학(東學)'이에요.
동쪽 동(東)에 배울 학(學), '동쪽의 배움'이라는 뜻이죠.
눈치채셨나요?
서학의 '서'를 정반대인 '동'으로 바꾼 이름이에요.
이건 우연이 아니라 일부러 그렇게 지은 거예요.
마치 '수입 과자'가 있으면 '우리 동네에서 만든 과자'라고 이름 붙여 구별하듯이, 서양에서 온 서학과 우리 동쪽 땅에서 난 배움을 딱 갈라놓으려 한 거죠.
이름 하나에 '우리 것은 우리 것답게'라는 생각이 통째로 담긴 셈이에요.
그래서 동학의 정체성은 이 이름에서 시작해요.
어떤 대단한 이론을 설명하기 전에, 이미 '이건 서학이 아니다'라는 선언이 이름표에 붙어 있는 거니까요.
최제우는 초기 가르침을 한자를 모르는 평민과 여성도 외우기 쉽게 4음보 노래체 한글로 지었는데, 이 점도 남의 것을 옮겨 온 게 아니라 우리 사람들의 것으로 만들려는 마음과 이어져요.
재미있는 건 최제우가 서학만 비판한 게 아니라는 점이에요.
당시 조선을 떠받치던 유교·불교·도교, 이 셋에도 아쉬움을 느꼈어요.
중국어 위키백과가 전하는 문장을 보면 이렇게 정리돼요.
儒教拘于名节,未达玄妙;佛教入于寂灭,而绝伦常;道教悠悠自然,缺乏治平
풀이하면 '유교는 명분과 절의에만 얽매여 깊고 오묘한 이치에 이르지 못했고, 불교는 고요히 사라지는 데(적멸) 빠져 사람 사이의 도리를 끊었으며, 도교는 자연에 유유히 머물러 세상을 다스리는 이치가 부족하다'는 뜻이에요.
다만 이 문장은 원전 《동경대전》 한문과 직접 대조된 게 아니라 2차로 전해진 서술이라, 큰 방향으로만 참고하는 게 좋아요.
정리하면 이래요.
| 가르침 | 최제우가 본 아쉬움 |
|---|---|
| 유교 | 명분·절의에 얽매여 깊은 이치에 못 이름 |
| 불교 | 적멸에 빠져 사람의 도리를 끊음 |
| 도교 | 자연에만 머물러 세상 다스림이 부족 |
| 서학 | 서양 것이라 우리 삶과 어긋남 |
그러니까 동학은 '기존 것을 다 버리자'가 아니라, 넷 모두가 채우지 못한 자리를 우리 땅에서 새로 세우려 한 배움이었어요.
여기서 가장 안타까운 대목이 나와요.
최제우는 서학에 분명히 반대했는데도, 조선 조정은 그를 서학과 한통속으로 몰아 처형했거든요.
조정은 동학과 천주교를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고 함께 탄압했어요.
관변 문서에는 '동학이라는 것은 서학의 방법을 그대로 이어받고 이름만 바꾸어 무지한 귀를 현혹한다'는 식의 서술까지 있었죠(영문 번역만 전하고 원문은 확인되지 않아요).
겉보기에 둘 다 나라가 통제하지 못하는 모임을 열고 낯선 믿음을 퍼뜨린다는 점이 비슷해 보였던 거예요.
마치 상표만 보고 완전히 다른 두 물건을 같은 것으로 착각한 셈이죠.
결국 최제우는 1864년 대구에서 참형돼요.
죄목은 한국어 자료에는 '좌도난정지율(左道亂正之律)', 중국어 자료에는 '혹세무민지죄(惑世誣民之罪)'로 조금 다르게 전해요.
어느 쪽이든 그의 죽음은 실제 천주교 포교 때문이 아니라 정부의 오인 때문이었다는 점이 중요해요.
한 가지 더 짚어 둘 게 있어요.
동학이 처음부터 반봉건·민족주의 정치운동이었다는 건 흔한 오해예요.
학자 수전 신에 따르면 최제우의 비전은 정치 강령이 아니라 종교적인 것이었고, 동포에게 전통 가치를 되살릴 힘이 있음을 일깨우려는 것이었대요.
같은 시기 1862년 농민봉기도 지방관 부패에 대한 반응이었을 뿐 동학과 직접 관련은 없었다고 분석돼요.
동학의 성격을 두고도 학자들 견해가 갈려서, 소정박은 여러 사상의 짜깁기가 아닌 '독창적 사상 체계'로 보고, 수전 신은 왕양명 계열 성리학과의 연속성을 강조해요.
동학의 정체성은 어렵게 볼 것 없이 이름에서 출발해요.
서양의 배움 '서학'에 맞서, 동쪽 우리 땅에서 난 배움을 '동학'이라 이름 붙였어요.
최제우는 서학만이 아니라 유교·불교·도교에도 부족함을 느끼고, 그 빈자리를 우리 방식으로 채우려 했어요.
그런데도 조정은 동학과 천주교를 혼동해 그를 서학으로 몰아 처형했죠.
그러니 최제우를 기억할 때는 두 가지를 붙잡아 두면 좋아요.
그는 서학에 반대했다는 것, 그리고 그의 죽음은 정부의 오해에서 비롯됐다는 것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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