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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시천주(侍天主)는 하늘을 저 먼 곳의 신으로 두지 않고, 사람마다 자기 안에 한울님을 모시고 있는 존재로 본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신분이 높든 낮든 누구나 귀하다는 생각이 여기서 나왔어요.
경주 사람 최제우(1824년~1864년)는 서른일곱 해를 살다 간 조선 후기의 사상가예요. 벼슬길이 막힌 채 스물한 살부터 서른한 살까지 약 10년간 장삿길로 전국을 떠돌며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을 직접 봤죠. 그러다 1860년 음력 4월 5일, 고향 구미산 용담정에서 특별한 종교 체험을 해요. 뒷날 '천사문답(天師問答)'이라 부르는, 한울님(상제)과 직접 말을 주고받았다는 경험이에요.
이 체험에서 최제우는 종이에 그려 태워 물에 타 마시는 부적(영부)과, 입으로 반복해 외는 주문을 받았다고 해요. 그리고 자신이 깨달은 가르침에 '동학(東學)'이라는 이름을 붙였어요. 당시 조선에 들어온 천주교를 '서학(西學), 서쪽에서 온 학문'이라 불렀는데, 그것과 구분해 '우리 동쪽의 학문'이라는 뜻으로요. 동학의 씨앗은 바로 이 순간에 심어졌어요.
동학의 심장에 자리한 말이 바로 '시천주(侍天主)'예요. '모실 시(侍)', '하늘 천(天)', '님 주(主)' — 그대로 풀면 '한울님을 모신다'는 뜻이에요. 여기서 가장 중요한 낱말이 '모신다'예요.
비유를 하나 들어 볼게요. 예전 사람들은 신을 저 하늘 꼭대기, 아주 높고 먼 곳에 계신 분으로 여겼어요. 임금님을 궁궐 깊은 곳에서 겨우 뵙듯, 신도 특별한 사람만 특별한 장소에서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최제우는 다르게 말했어요. 한울님은 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사람마다 자기 몸과 마음 안에 이미 모시고 있는 분이라고요.
집을 떠올려 보면 쉬워요. 귀한 손님이 오면 우리는 그분을 대문 밖이 아니라 안방에 모시고 정성껏 대접하잖아요. 시천주는 사람이 누구나 자기 안에 그런 귀한 손님, 곧 한울님을 모시고 사는 존재라는 이야기예요. 그러니 신을 만나겠다고 먼 산으로 떠나거나 값비싼 제물을 바칠 필요가 없어요. 내 안에 이미 모신 한울님을 알아차리고 정성껏 대하면 되니까요. '시천주'는 바로 이 알아차림을 한마디로 담은 말이에요.
당시 조선은 신분의 벽이 아주 단단한 사회였어요. 양반과 평민, 남자와 여자, 주인과 종의 자리가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었죠. 그런데 시천주는 '모든 사람이 똑같이 자기 안에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고 말해요. 신분이 높든 낮든, 남자든 여자든 그 점에서는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거예요. 안에 귀한 손님을 모신 사람이라면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것처럼요.
최제우는 이 가르침을 어려운 한문 경전으로만 남기지 않았어요. 누구나 따라 부를 수 있게 4음보 가락의 한글 가사로도 지었죠. 노래하듯 외기 쉬워서 한자를 모르는 평민과 여성도 입으로 익힐 수 있었어요. 그래서 동학은 빠르게 퍼져, 최제우가 붙잡히기 전에 이미 열두 곳이 넘는 고을에 조직이 생기고, 1862년에는 접주(接主) 열여섯 명을 둘 만큼 커졌어요.
여기서 오해 하나를 짚고 갈게요. 동학이 처음부터 나라를 뒤엎으려는 정치 운동이었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학자들은 최제우 본인의 뜻은 무엇보다 '종교적'인 것이었다고 봐요. 사람들에게 네 안에 이미 귀한 힘, 곧 한울님이 있다는 걸 일깨우려 한 것이지, 구체적인 정치 강령을 내세운 건 아니었다는 거죠. 같은 시기에 일어난 1862년 농민봉기도 지방 관리들이 부패해서 일어난 반발이었을 뿐 동학과 직접 이어지지는 않았다는 분석이 있어요.
또 하나, 최제우는 서학(천주교)에 오히려 반대하는 입장이었어요. 그런데도 조선 조정은 동학을 천주교와 헷갈려 '삿된 가르침으로 백성을 어지럽힌다'며 잡아들였고, 1864년 대구에서 처형했어요. 그의 죽음은 실제로 천주교를 퍼뜨려서가 아니라 정부의 오해에서 비롯된 면이 컸어요.
최제우는 1860년 용담정 체험 뒤 자신의 깨달음을 '동학'이라 이름 짓고, 서쪽에서 온 서학과 구분했어요. 그 핵심에 놓인 말이 '시천주', 한울님을 저 먼 하늘이 아니라 사람마다 자기 안에 모시고 있다는 생각이에요. 누구나 한울님을 모신 존재라는 이 한마디는, 신분의 벽이 단단하던 조선에서 사람을 새롭게 바라보게 했죠. 다만 그것은 처음엔 정치 강령이 아니라 종교적 자각이었고, 최제우는 서학에 반대했는데도 오해 속에 목숨을 잃었다는 점을 함께 기억해 두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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