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 좀 가리지 마라디오게네스
햇빛 좀 가리지 마라디오게네스
매일 아침, 인도의 학교에서는 아이들이 일어나 노래를 부릅니다.
같은 시각, 국경 너머 방글라데시의 학교에서도 아이들이 노래를 부릅니다.
두 노래는 가사도 멜로디도 다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두 노래를 쓴 사람은 같은 사람입니다.
인도의 국가 '자나 가나 마나'.
방글라데시의 국가 '아마르 쇼나르 방글라'.
한 사람이 두 나라의 국가를 만든 건 세계 역사에서 이 사람이 유일합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시인이고, 작곡가이고, 화가이고, 교육자이고, 철학자입니다.
이렇게 나열하면 교과서 같으니까, 조금 다르게 말해볼게요.
타고르는 '말의 힘'으로 세상을 바꾼 사람입니다.
총 한 방 쏘지 않고, 시 한 편으로 수백만 명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그 이야기를 처음부터 해보겠습니다.
1861년, 인도 콜카타.
타고르는 벵골에서 가장 부유하고 유명한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타고르 가문은 오늘날로 치면 대기업 총수 집안 같은 곳이었어요.
예술가, 사업가, 학자가 한 지붕 아래 모여 살았죠.
그런데 이 집 막내아들은 좀 달랐습니다.
학교를 싫어했거든요.
당시 인도의 학교는 영국식이었습니다.
선생님이 칠판에 쓴 걸 베끼고, 외우고, 시험 보고.
타고르는 이걸 "새장에 갇힌 새"에 비유했습니다.
날개가 있는데 날지 못하게 하는 곳이라고요.
그래서 어린 타고르는 학교 대신 자연으로 갔습니다.
거대한 반얀나무 아래 앉아 시를 썼고, 강가를 걸으며 노래를 만들었습니다.
여덟 살에 첫 시를 썼고, 열여섯 살에 첫 단편소설을 발표했습니다.
보통 아이들이 수학 문제를 풀 나이에, 그는 이미 작가였습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점이 있습니다.
타고르의 아버지 데벤드라나트는 엄격한 사람이었지만, 아들을 억지로 학교에 보내지 않았습니다.
대신 열일곱 살의 타고르를 영국 유학에 보냈어요.
런던에 간 타고르는 어떻게 했을까요?
대학을 중퇴했습니다.
학위 없이 인도로 돌아왔어요.
실패일까요?
타고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학교에서 배운 것은 다 잊었지만, 스스로 배운 것은 하나도 잊지 않았다."
이 경험이 훗날, 세상에서 가장 특이한 학교를 만드는 씨앗이 됩니다.
그 이야기는 잠시 뒤에 할게요.
1900년대 초,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였습니다.
영국은 인도를 더 쉽게 다스리기 위해 벵골을 둘로 쪼개려 했습니다.
하나의 민족, 하나의 문화를 가진 땅을 칼로 잘라 반으로 나누겠다는 겁니다.
지금으로 치면, 누군가 서울과 경기도 사이에 국경선을 긋겠다고 선언한 것과 비슷합니다.
벵골 사람들은 분노했습니다.
이때 타고르가 한 일은 무기를 드는 게 아니었습니다.
노래를 썼습니다.
"아마르 쇼나르 방글라" — '나의 황금빛 벵골'이라는 뜻의 이 노래는 벵골 사람들의 비공식 국가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거리에서 이 노래를 불렀고, 집에서 불렀고, 시위 현장에서 불렀습니다.
군대가 총을 들었지만, 시인의 노래를 이기지는 못했습니다.
타고르는 마하트마 간디와도 깊은 관계를 맺었습니다.
사실 '마하트마'라는 별명, 즉 '위대한 영혼'이라는 칭호를 간디에게 처음 붙인 사람이 바로 타고르라는 설이 있습니다.
두 사람은 인도의 독립이라는 같은 꿈을 꿨지만, 방법에 대해서는 종종 다투었습니다.
간디는 서양 문명을 거부하자고 했고, 타고르는 동양과 서양이 만나야 한다고 했습니다.
간디가 물레를 돌리며 인도산 옷만 입자고 할 때, 타고르는 말했습니다.
"좁은 민족주의의 벽에 갇히지 말자. 세계 전체가 우리 집이다."
그리고 1919년,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잘리안왈라 바그 학살.
영국군이 비무장 시민 수백 명을 총으로 쏴 죽인 사건입니다.
축제를 즐기러 모인 사람들이 갇힌 광장에서 무차별 사격을 당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타고르는 영국 왕실로부터 받은 기사 작위를 반납합니다.
당시 기사 작위는 엄청난 명예였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노벨상 메달을 돌려보내는 것과 비슷한 일이에요.
타고르는 편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이 보잘것없는 칭호를 가지고 있는 것이 수치스럽습니다."
시인의 펜은 조용했지만, 그 울림은 어떤 폭탄보다 컸습니다.
1913년, 타고르는 아시아인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받습니다.
수상작은 기탄잘리, '노래의 헌정'이라는 뜻의 시집입니다.
기탄잘리는 신에게 바치는 시이지만, 종교적인 느낌보다는 사랑의 편지에 가깝습니다.
"나를 이 세상에 데려다 놓은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같은 구절은 종교를 떠나 누구나 가슴이 뭉클해지는 말입니다.
노벨상 상금은 당시로서는 큰돈이었습니다.
타고르는 이 돈으로 무엇을 했을까요?
집을 사거나 은행에 넣은 게 아닙니다.
학교를 키웠습니다.
어린 시절 학교가 싫었던 그 소년, 기억나시죠?
타고르는 이미 1901년에 산티니케탄이라는 학교를 세워두었습니다.
산티니케탄은 '평화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이 학교는 세상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곳이었습니다.
담장이 없었습니다.
교실이 없었습니다.
나무 아래가 교실이었습니다.
비유가 아니라 진짜로 그랬습니다.
망고나무 아래 아이들이 둘러앉으면 그곳이 교실이 되었습니다.
선생님은 칠판 앞에 서는 대신 아이들과 함께 바닥에 앉았습니다.
타고르의 교육 철학은 단순했습니다.
"자연이 가장 좋은 선생님이다."
아이들은 새를 관찰하며 과학을 배우고, 강물을 보며 지리를 배우고, 별을 세며 수학을 배웠습니다.
암기가 아니라 경험으로 배우는 학교.
시험 성적이 아니라 호기심이 기준인 학교.
이 작은 학교는 지금 비스바바라티 대학교라는 이름의 국립대학이 되었습니다.
노벨상 경제학자 아마르티아 센, 영화감독 사티야지트 레이 같은 인물이 이 나무 아래에서 공부했습니다.
학교가 싫었던 소년이 만든 학교가, 결국 세계적인 인물들을 길러냈습니다.
인생의 아이러니가 이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을까요.
타고르는 1941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80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그런데 왜 지금도 타고르를 이야기할까요?
첫째, 타고르는 동양과 서양 사이에 다리를 놓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인도의 전통을 사랑했지만, 서양을 배척하지 않았습니다.
아인슈타인과 우주에 대해 대화를 나눴고, 일본에서 강연했고, 중국과 유럽을 여행하며 문화의 벽을 허물었습니다.
국경이 그어지는 시대에, 그는 국경을 지우려 했습니다.
"나는 어떤 나라도 섬기지 않겠다"는 그의 선언은, 지금 이 시대에 더 절실하게 울립니다.
세계 곳곳에서 갈등과 혐오가 커질수록, 타고르의 목소리가 필요합니다.
둘째, 타고르의 시는 일상의 언어로 깊은 진실을 말합니다.
철학책을 읽으면 머리가 아프지만, 타고르의 시를 읽으면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어려운 말을 하나도 쓰지 않으면서, 삶의 본질을 건드립니다.
그의 가장 유명한 구절 중 하나를 볼까요.
"세상이 좁은 담벼락으로 조각조각 나뉘지 않은 곳, 그곳으로 나의 조국이여, 깨어나소서."
이 문장은 100년 전에 쓰였지만, 마치 오늘 아침 뉴스를 보고 쓴 것 같습니다.
셋째, 타고르는 놀라울 정도로 다재다능했습니다.
시를 2천 편 넘게 썼고, 소설과 희곡을 수십 편 남겼고, 노래를 2천 곡 넘게 작곡했습니다.
예순이 넘어서는 갑자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그 그림들도 세계적으로 전시되었습니다.
그는 한 분야에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것에 도전한 사람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타고르의 말은 세대를 넘어 살아 숨 쉽니다.
BTS의 RM은 유엔 연설에서 이런 취지의 말을 했습니다.
"자신의 이름으로 말하라. 자신의 목소리를 찾으라."
이 생각의 뿌리에는 타고르가 평생 외친 메시지가 있습니다.
자기 안의 목소리를 듣고, 그것을 세상에 내놓으라는 것.
타고르의 시를 읽는 건 100년 전 인도를 공부하는 게 아닙니다.
지금 여기,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입니다.
오늘 밤, 잠들기 전에 타고르의 시 한 편을 읽어보세요.
그의 문장이 당신의 하루 끝에 조용히 앉아, 따뜻한 차 한 잔을 건넬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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