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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막스 셸러는 인간을 정신과 생명충동이 만나는 자리로 봤어요. 정신은 무엇이 가치 있는지 알아보지만 그 자체로는 아무 힘이 없고, 몸과 본능에서 솟는 에너지인 생명충동을 빌려야 비로소 세상에서 일을 해낸다고 했지요.
"운동해야지" 머리로는 알면서도 소파에서 안 일어나 본 적 있나요?
방향은 아는데 몸이 안 따라오는 그 순간이, 사실 막스 셸러 철학의 한복판이에요.
막스 셸러(1874년부터 1928년까지)는 독일 뮌헨에서 태어난 철학자로, 20세기 '철학적 인간학'을 세운 사람으로 꼽혀요.
인간이 도대체 무엇인지 정면으로 물은 사람이지요.
세상을 떠나던 해에 펴낸 책 『우주에서 인간의 지위』(Die Stellung des Menschen im Kosmos)에서 그는 인간을 두 힘이 겹쳐 있는 존재로 그렸어요.
하나는 '정신', 다른 하나는 '생명충동'이에요.
쉽게 비유하면 이래요.
정신은 지도를 읽는 사람이에요.
어디가 옳은 길이고 어디가 아름다운지 알아보지만, 정작 걸어갈 다리가 없어요.
생명충동은 힘센 두 다리예요.
배고픔, 번식, 살아남으려는 기운처럼 몸에서 솟는 에너지라 얼마든지 달릴 수 있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는 몰라요.
인간은 이 둘이 한 몸에 들어 있는 존재라는 거예요.
셸러가 놀라운 말을 해요.
가장 높은 능력인 정신이, 사실은 가장 약하다는 거예요.
정신은 무엇이 참되고 아름답고 귀한지 알아보지만, 스스로 움직일 에너지는 한 방울도 없어요.
반대로 생명충동은 엄청난 힘을 가졌지만 눈이 멀어서 방향을 몰라요.
그래서 인간에게 필요한 건 대결이 아니라 협력이에요.
정신은 생명충동을 억지로 짓누르는 대신, 그 힘을 살짝 끌어와 방향을 얹어 줘요.
마치 강물과 물길의 관계 같아요.
강물은 세차게 흐르지만 내버려 두면 아무 데로나 넘쳐요.
물길과 수문은 스스로 물을 만들지 못해도, 그 물에 방향을 줘서 발전기를 돌리게 하지요.
정신 혼자서도, 충동 혼자서도 안 되고 둘이 만나야 무언가가 이루어져요.
셸러는 이보다 앞선 시기에 이미 '가치에는 높낮이가 있다'고 봤어요.
그것도 사람 마음대로가 아니라, 객관적으로 정해진 위계라고요.
그가 나눈 가치는 네 가지예요.
| 가치 양태 | 대표적인 예 |
|---|---|
| 감각적 가치 | 쾌적함과 불쾌함 |
| 생명 가치 | 고귀함과 저속함 |
| 정신적 가치 | 아름다움과 추함, 옳음과 그름, 참과 거짓 |
| 신성한 가치 | 성스러움과 속됨 |
(흔히 다섯 단계로 소개되지만, 셸러의 기본 양태는 이 네 가지예요.
'유용함'은 감각적 가치에서 갈라져 나온 곁가지고요.)
셸러는 낮은 가치보다 높은 가치를 더 좋아하는 것이 옳다고 봤어요.
그런데 사람은 지성으로 이 사다리를 계산하지 않아요.
사랑과 미움이라는 마음의 움직임 속에서 먼저 느껴요.
이렇게 사람마다 무엇을 더 사랑하는지에 따라 정해지는 질서를 그는 '사랑의 질서(ordo amoris)'라고 불렀어요.
정신과 생명충동 이야기는 결국, 이 높은 가치들을 사람 안에서 실제로 이루어 내는 문제로 이어져요.
방향(정신)만 알아서는 안 되고 힘(충동)이 있어야 하니까요.
셸러의 그림은 우리 일상과 딱 붙어 있어요.
우리는 늘 '머리로 아는 것'과 '실제로 사는 것' 사이에서 흔들려요.
옳은 걸 알아도 몸이 안 움직이고, 힘은 넘치는데 엉뚱한 데 쏟곤 하지요.
셸러의 답은 정신을 너무 높이지도, 본능을 부끄러워하지도 말라는 거예요.
결심 하나로 사람이 바뀌지 않아요.
방향을 아는 정신이, 몸의 에너지와 습관과 손을 잡을 때에야 삶이 실제로 움직여요.
인간은 천사도 짐승도 아니라, 그 둘이 겹쳐 서로를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거예요.
막스 셸러는 인간을 정신과 생명충동이 만나는 자리로 봤어요.
정신은 무엇이 귀한지 알아보지만 힘이 없고, 생명충동은 힘이 세지만 방향을 몰라요.
그래서 인간에게 중요한 건 둘의 협력이에요.
정신이 충동의 에너지를 빌려 방향을 얹을 때, 우리가 아는 가치가 비로소 삶 속에서 이루어져요.
운동해야지 생각만 하고 소파에서 못 일어나던 그 순간에도, 사실은 정신과 생명충동이 서로 손을 뻗고 있었던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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