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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르상티망은 힘없는 사람이 부러움과 미움을 곧바로 터뜨리지 못하고 마음속에 오래 삼키는 사이, "저건 원래 나쁜 거야"라며 손에 못 넣는 가치를 깎아내려 자기 도덕처럼 둔갑시키는 감정이에요. 막스 셸러는 이 뒤집힌 감정이 근대 도덕의 밑바닥에 깔려 있다고 봤어요.
친구는 갖고 싶던 장난감을 가졌는데 나는 못 가졌어요.
부러워요.
그런데 화를 낼 수도, 뺏을 수도, 새로 살 수도 없어요.
이 감정을 계속 삼키다 보면 어느 순간 이렇게 말하게 돼요.
"저런 장난감은 유치해. 저거 갖고 노는 애가 바보야."
부러움이 미움으로, 미움이 "저건 원래 나쁜 것"이라는 판단으로 슬그머니 바뀐 거예요.
막스 셸러(Max Scheler, 1874년부터 1928년까지 산 독일 철학자)가 1915년에 쓴 책 『르상티망』(Ressentiment)이 다루는 게 바로 이 마음이에요.
르상티망은 프랑스어로 "다시(re) 느낀다"는 뜻인데, 한 번 느낀 분함을 흘려보내지 못하고 자꾸 되씹는 상태를 가리켜요.
셸러가 주목한 건, 이게 그냥 기분이 아니라 사람이 무엇을 좋다·나쁘다 판단하는 기준 자체를 몰래 비틀어 놓는다는 점이에요.
셸러는 우리 기분과 상관없이 가치에는 객관적인 높낮이 순서가 있다고 봤어요.
낮은 데서 높은 데로, 네 가지 층이에요.
| 가치의 층 | 쉬운 예 |
|---|---|
| 감각적 가치 | 맛있다·기분 좋다 |
| 생명 가치 | 고귀함·건강함 |
| 정신적 가치 | 아름다움·옳음·참 |
| 신성한 가치 | 성스러움 |
원래는 높은 가치를 더 좋아하는 게 맞아요.
그런데 르상티망에 사로잡힌 사람은 높은 가치에 손이 닿지 않아요.
그럼 어떻게 할까요?
그 높은 가치를 "사실 별거 아니야", "오히려 나쁜 거야"라고 깎아내려요.
앞에 나온 장난감 이야기처럼요.
손이 안 닿으니까 목표를 낮추는 게 아니라, 좋고 나쁨의 잣대 자체를 거꾸로 뒤집어 버리는 거죠.
셸러는 이렇게 삼켜진 원한이 근대 부르주아 도덕, 즉 "부지런하고 조심스럽고 눈에 안 띄는 게 착한 것"이라는 도덕의 숨은 뿌리라고 봤어요.
르상티망이라는 말은 원래 니체가 먼저 썼어요.
그래서 두 사람을 같은 편으로 묶기 쉬운데, 결론은 정반대예요.
| 니체 | 셸러 | |
|---|---|---|
| 르상티망이 낳은 것 | 기독교 도덕 자체 | 근대 부르주아 도덕 |
| 기독교적 사랑(아가페) | 약자의 원한이 만든 것 | 오히려 원한을 넘어서는 것 |
니체는 기독교 도덕을 통째로 약자의 원한이 지어낸 것으로 봤어요.
하지만 셸러는 달라요.
진짜 사랑, 즉 자기가 넉넉히 가진 사람이 아래로 흘려보내는 사랑은 원한과 정반대라고 봤어요.
원한은 못 가진 자가 위를 끌어내리는 것이고, 사랑은 가진 자가 아래로 몸을 굽히는 것이니까요.
같은 단어를 쓰면서도 셸러는 니체의 결론을 뒤집은 셈이에요.
이솝 우화의 여우가 떠올라요.
높이 달린 포도에 입이 안 닿자 "저 포도는 어차피 실 거야" 하고 돌아서죠.
이게 딱 르상티망이에요.
오늘도 흔해요.
못 가진 것을 "저건 원래 별로야"라고 미리 깎아내리고, 애쓰는 사람을 "유난 떤다"고 비웃는 마음.
셸러의 분석이 무서운 건, 이 뒤집기가 자기 눈에는 원한이 아니라 어엿한 신념처럼 보인다는 점이에요.
그래서 셸러는 이렇게 물어보게 해요.
내가 지금 "저건 나쁜 거야"라고 말할 때, 그게 정말 나쁜 걸까요, 아니면 내 손이 안 닿아서 그렇게 부르는 걸까요?
이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질 수 있다면, 원한에 삼켜지지 않고 잠깐 멈춰 설 수 있어요.
르상티망은 힘없는 사람이 부러움과 미움을 삼키다가, 손에 못 넣는 가치를 "원래 나쁜 것"이라 깎아내려 도덕으로 둔갑시키는 감정이에요.
셸러는 이 뒤집힌 감정이 근대 도덕의 숨은 뿌리라고 봤지만, 니체와 달리 진짜 사랑은 원한을 넘어선다고 봤어요.
"저건 별로야"라는 내 판단이 진심인지 신 포도인지 되물을 때, 우리는 이 원한에서 한 걸음 벗어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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