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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매킨타이어는 현대의 도덕 언어가 옛 전통에서 떨어져 나온 '조각들'만 남은 상태라고 봤어요. 그래서 옳고 그름을 다시 말하려면 아리스토텔레스처럼 공동체의 실천과 이야기 속에서 덕을 길러야 한다고 주장했지요.
앨러스터 매킨타이어(Alasdair MacIntyre, 1929~2025)는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서 태어나 2025년 5월 미국에서 96세로 세상을 떠난 철학자예요.
그는 젊은 시절 마르크스주의자였다가, 1971년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에게로 방향을 크게 틀었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사상을 '아리스토텔레스의 부활'이라고 불러요.
부활이라니, 2천 년도 더 된 옛날 사람을 왜 다시 불러냈을까요?
매킨타이어가 보기에 오늘날 우리는 '착하게 살아라'라고 말하면서도 그 말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 서로 합의하지 못하거든요.
그는 1981년에 낸 대표작 『덕의 상실(After Virtue)』에서, 잃어버린 답을 아리스토텔레스식 '덕(virtue)' 개념에서 다시 찾자고 제안했어요.
이 책은 20세기 영어권 도덕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책 중 하나로 꼽히고, 오늘날 덕 윤리가 되살아난 바탕이 되었지요.
매킨타이어는 책 첫머리에서 재미있는 상상을 하나 던져요.
'불안한 제안(A Disquieting Suggestion)'이라는 이야기예요.
어느 날 사람들이 과학에 화가 나서 실험실을 부수고, 책을 태우고, 과학자를 쫓아냈다고 해봐요.
세월이 흘러 후손들이 불에 타다 남은 종이 몇 장을 주워, 거기 적힌 낱말들을 짜맞춰 '과학'을 되살리려 해요.
겉보기엔 과학 용어를 쓰지만, 실제 알맹이는 텅 빈 흉내에 그치겠지요.
매킨타이어는 오늘 우리의 도덕 언어가 딱 이 꼴이라고 봤어요.
'정의' '권리' '선함' 같은 말은 남았는데, 그 말들이 원래 뿌리내리고 있던 전통은 사라졌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는 현대 문화를 '정서주의(emotivism)'라고 진단해요.
도덕적 주장이 객관적 근거가 있는 척하지만, 알고 보면 '나는 이게 좋아'라는 취향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마치 아이스크림 맛 고르듯 옳고 그름을 고르는 셈이지요.
그럼 답은 뭘까요?
매킨타이어는 '실천(practice)'이라는 열쇠말을 꺼내요.
실천이란 축구, 요리, 바이올린 연주처럼 여러 사람이 함께 오래 이어온 활동을 말해요.
이런 활동에는 그 안에서만 얻을 수 있는 진짜 좋음, 즉 '내재적 선(goods internal to the practice)'이 있어요.
축구를 이겨서 얻는 상금 말고, 멋진 패스가 통했을 때의 그 기쁨 같은 것 말이에요.
덕은 바로 이 내재적 선을 얻게 해주는 몸에 밴 능력이에요.
매킨타이어의 말을 빌리면 "A virtue is an acquired human quality... which tends to enable us to achieve those goods which are internal to practices"(덕이란 실천에 내재한 좋음을 이루게 해주는, 익혀서 갖추는 인간의 성질이다)예요.
정직·용기·인내가 없으면 좋은 축구선수도, 좋은 음악가도 될 수 없다는 거지요.
그런데 덕은 한 판의 경기만으로 끝나지 않아요.
매킨타이어는 덕을 세 층으로 봐요.
| 층위 | 무엇을 지탱하나 |
|---|---|
| 실천 | 축구·요리 같은 활동 속 좋음 |
| 삶 전체 | 한 사람의 인생이라는 이야기 |
| 전통 | 여러 세대가 이어온 공동체 |
그래서 그는 "The self has to find its moral identity in and through its membership in communities"(자아는 공동체의 일원이 됨으로써 도덕적 정체성을 찾는다)라고 했어요.
나는 혼자 뚝 떨어진 개인이 아니라, 가족·나라·전통이라는 이야기 속 한 인물이라는 뜻이에요.
이야기의 앞뒤를 알아야 지금 내가 뭘 해야 할지도 보이지요.
첫째, 그를 그냥 '덕 윤리학자'로 묶으면 오해예요.
본인은 자기 작업이 통상적인 덕 윤리 바깥에 있고, 사회적 실천에 단단히 뿌리내린 아리스토텔레스주의로 읽혀야 한다고 밝혔어요.
둘째, 그의 '전통에 따라 합리성이 달라진다'는 생각을 '아무 말이나 다 맞다'는 상대주의로 읽는 사람이 많아요.
하지만 매킨타이어는 이를 부인했어요.
세계 자체가 여러 전통의 옳고 그름을 시험하는 잣대가 된다고 답했지요.
이 논쟁은 학계에서 아직도 이어지고 있어요.
셋째, 그는 자기 생각도 계속 고쳤어요.
1999년 책 『의존적 이성적 동물(Dependent Rational Animals)』에서는, 생물학과 떼어놓고도 윤리학이 가능하다던 예전 주장이 잘못이었다고 스스로 바로잡았어요.
결론을 다 안다고 착각하는 철학자를 두고 그는 "Philosophers have customarily been Emmas and not Hamlets"(철학자들은 늘 햄릿이 아니라 엠마였다)라고 꼬집었는데, 정작 자신은 끊임없이 의심하며 방향을 바꾼 사람이었지요.
매킨타이어의 '아리스토텔레스 부활'은 옛날 철학으로 돌아가자는 향수가 아니에요.
우리가 쓰는 도덕 언어가 뿌리를 잃고 조각만 남았다는 진단이 먼저고, 그 뿌리를 실천·이야기·전통이라는 세 층에서 다시 기르자는 처방이 그다음이에요.
덕은 혼자 머리로 정하는 규칙이 아니라, 함께 오래 해온 활동 속에서 몸에 배는 능력이라는 것.
그리고 나라는 사람은 공동체의 이야기 속에서 비로소 '어떻게 살아야 하나'를 알게 된다는 것.
이 두 가지만 기억해도 그의 부활이 왜 오늘까지 회자되는지 알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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