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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바디우는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오래된 질문을 철학이 아니라 수학, 그중에서도 집합론으로 풀 수 있다고 봤어요. 세상에는 하나로 뭉쳐진 궁극의 전체가 없고 오직 '여럿'만 있는데, 그 여럿을 정확하게 다루는 언어가 수학이기 때문이에요.
1937년 1월 17일에 태어난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Alain Badiou)의 아버지 레몽 바디우는 수학자였어요. 아들도 파리 고등사범학교(ENS)에서 1955년부터 1960년까지 공부했고, 평생 수학을 손에서 놓지 않았지요. 그 결과가 바로 '수학적 존재론(ontologie mathématique)'이에요.
존재론이란 "있다는 게 대체 무엇이냐"를 따지는, 철학에서 가장 밑바닥에 있는 분야예요. 바디우의 대담한 주장은 이거예요. 그 질문에는 사실 수학이 이미 답하고 있다는 거죠. 요리로 비유하면, 다른 철학자들이 "맛있다는 게 무엇인가"를 말로만 설명할 때, 바디우는 "그건 이미 레시피(수학)가 정확히 적어 두고 있다"고 말하는 셈이에요. 그에게 존재를 사유하는 가장 엄밀한 언어는 수학이었어요.
바디우 존재론의 출발점은 한 문장이에요. "일자는 없다(l'Un n'est pas)", 즉 '하나'는 없다는 말이에요.
우리는 세상을 자꾸 하나로 묶고 싶어 해요. '우주 전체', '자연 전체', '신'처럼 모든 것을 감싸는 커다란 하나가 있다고 믿고 싶어 하죠. 바디우는 그런 궁극의 '하나'는 없다고 잘라 말해요. 실제로 있는 것은 오직 '여럿', 그가 '다자(multiple)'라고 부르는 것뿐이에요.
그럼 이 여럿을 어떻게 정확히 다룰까요? 바디우는 집합론을 '순수한 여럿을 사유할 유일한 방법'이라고 봤어요. 집합은 원소들의 묶음이잖아요. 사과 세 개를 담은 바구니처럼요. 세계도 이렇게 묶음 안에 또 묶음이 든 구조로 되어 있다는 거예요. 하나로 완성된 전체 대신, 끝없이 이어지는 여럿의 겹침만 있는 거죠.
그렇다면 이 모든 여럿의 밑바닥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바디우의 답은 뜻밖에도 '텅 빈 것'이에요. 그는 존재의 고유한 이름을 공집합(Ø)이라고 했어요. 공집합은 아무것도,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 담고 있지 않은 빈 상자 같은 집합이에요.
비유하면 이래요. 러시아 인형을 계속 열다 보면 맨 안쪽엔 텅 빈 가장 작은 인형이 나오죠. 바디우에게 존재의 바닥은 그런 '빈 것'이에요. 모든 여럿이 결국 이 텅 빈 곳에서 쌓여 올라온다는 거죠.
여기서 무신론이 나와요. 집합론의 기초공리(정칙성 공리)는 어떤 집합이 자기 자신을 원소로 담는 것을 금지해요. 그러니 '모든 것을 자기 안에 담는 하나의 전체'는 있을 수 없어요. 바디우는 이를 근거로 자연 전체나 신 같은 거대한 하나의 존재를 부정했어요. 집합론을 만든 게오르크 칸토어가 신앙을 품었던 것과 정반대로, 바디우는 철저한 무신론으로 나아갔지요.
그런데 여럿과 빈 것만으로는 세상에 새로운 일이 왜 생기는지 설명하기 어려워요. 여기서 '사건(événement)'이 등장해요. 사랑에 빠지는 순간, 혁명이 일어나는 순간, 새로운 과학이 열리는 순간처럼, 기존 질서로는 계산되지 않던 무언가가 불쑥 터지는 거예요.
바디우는 수학자 폴 코언의 '포싱(forcing)'과 '유적 집합(generic set)' 개념을 빌려 왔어요. 아직 정답이 정해지지 않은, 결정 불가능한 것에 주체가 이름을 붙이며 진리를 만들어 간다는 거죠. 그의 윤리 준칙은 "결정 불가능한 것에 대해 결정하라"였어요. 그는 갈릴레오가 관성 원리를 외쳤을 때는 아직 완성된 진리가 아니었고, 데카르트와 뉴턴이라는 훗날의 만남을 거치고 나서야 새 물리학의 진리에 닿았다고 설명했어요. 진리는 한 번에 완성되지 않고 오랜 시간 충실하게 이어 가는 과정이라는 뜻이에요.
그에게 진리가 만들어지는 통로는 넷이에요. 예술, 사랑, 정치, 과학이지요. 철학은 이 넷에 봉사할 뿐, 그중 하나에만 스스로를 '봉합(suture)'해 버리면 '철학적 재앙'이 온다고 경고했어요. 1988년 쇠유 출판사에서 낸 대표작 『존재와 사건(L'Être et l'Événement)』에 이 생각이 담겨 있어요.
조심할 점이 있어요. '수학을 썼으니 완벽하게 증명된 철학'이라고 오해하면 안 돼요. 그의 집합론 사용은 학계에서 논쟁적이에요. 앨런 소칼과 장 브리크몽, 로저 스크루턴 같은 학자들은 그가 칸토어와 코언의 이론을 엄밀하게 쓰지 못했다고 비판했어요.
또 그의 '사건'을 "내가 결정하면 참이 된다"는 식의 주관적 결단으로 읽으면 안 돼요. 바디우 자신이 '결정주의자'로 불리는 것을 강하게 거부했으니까요. 정치 이력도 마찬가지예요. 그는 1970년 전후 마오주의 조직에서 활동했지만, 흔히 '포스트 마오주의'로 분류되고 스스로도 그 계보를 단순하지 않게 규정했어요.
| 흔한 오해 | 실제 |
|---|---|
| 수학으로 완벽히 검증됨 | 수학 인용의 엄밀성은 논쟁 중 |
| 결정하면 진리가 됨 | 결정주의를 스스로 거부 |
| 정통 마오주의자 | 포스트 마오주의로 분류 |
바디우의 수학적 존재론은 세 걸음으로 기억하면 돼요. 첫째, 존재를 사유하는 언어는 수학, 특히 집합론이에요. 둘째, 세상에 궁극의 '하나'는 없고 오직 여럿만 있으며, 그 바닥엔 텅 빈 공집합이 있어요. 셋째, 예술·사랑·정치·과학에서 터지는 사건을 통해 주체가 진리를 만들어 가요. 다만 그의 수학 사용은 논쟁 중이고, 그를 단순한 결단주의자나 정통 마오주의자로 보는 것은 정확하지 않아요. 수학을 무기 삼아 존재라는 오래된 질문에 새로 답하려 한 철학자, 사람들은 오늘도 그 이름을 그렇게 기억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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