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코멘트
0
개
로딩 중입니다
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은 색이나 아름다움, 공간을 우리와 다르게 떠올립니다. 디드로는 여기서 사람의 모든 생각이 타고나는 게 아니라 각자의 감각 경험이 만든다고 봤고, 그렇다면 신에 대한 믿음조차 감각 없이는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1749년, 파리에 이름 없는 얇은 책 한 권이 나왔습니다.
제목은 『맹인에 관한 편지』, 원제를 그대로 옮기면 「볼 수 있는 사람들을 위한, 맹인에 관한 편지」(Lettre sur les aveugles à l'usage de ceux qui voient)예요.
저자 이름은 적혀 있지 않았지만, 이 책은 곧 서른여섯 살의 드니 디드로를 '독창적인 사상가'로 세상에 알렸습니다.
디드로(1713년부터 1784년까지 살았어요)는 나중에 『백과전서』를 이끄는 계몽주의의 대장이 되는 사람인데, 그를 처음 유명하게 만든 게 바로 이 작은 편지였습니다.
제목만 보면 앞 못 보는 사람을 돕는 복지 안내서 같지만, 사실은 정반대입니다.
"눈이 보이는 우리가, 앞 못 보는 사람에게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를 묻는 철학책이거든요.
디드로의 답은 간단하면서도 위험했습니다.
사람의 생각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진 감각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이죠.
그 무렵 철학자들 사이에서 유명하던 질문 하나를 디드로도 진지하게 파고듭니다.
태어날 때부터 앞을 못 보던 사람이 손으로 만져서 공과 주사위를 구별할 줄 압니다.
어느 날 수술로 갑자기 눈을 뜨게 됐어요.
이 사람은 이제 눈으로만 보고 "저건 공, 저건 주사위"라고 맞힐 수 있을까요?
우리 직관은 "당연히 맞히지"라고 말하지만, 디드로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손으로 아는 둥근 느낌과 눈으로 보는 둥근 모양은 완전히 다른 정보라서, 처음 눈 뜬 사람은 한동안 헤맬 거라는 거예요.
실제로 이런 수술을 받은 사람이 처음엔 세상을 제대로 못 알아봤다는 이야기가 이 편지에 나옵니다.
여기서 결론이 나옵니다.
우리 생각이 감각에 따라 이렇게 달라진다면, '아름다움'이나 '옳고 그름' 같은 것도 사람마다, 감각마다 다를 수 있다는 거죠.
예를 들어 상상해 보세요.
앞 못 보는 사람에게 '남의 것을 몰래 가져간다'는 일은 눈에 안 띄게 숨기는 문제가 아니라 손이 닿느냐 마느냐의 문제일 겁니다.
디드로는 이렇게, 눈이라는 하나의 감각을 빼기만 해도 도덕과 세계관이 통째로 달라지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편지의 절정에는 실제 인물이 등장합니다.
영국 케임브리지의 수학 교수였던 손더슨(Nicholas Saunderson)은 갓난아기 때 병으로 두 눈을 잃었지만, 평생 빛을 본 적 없이도 빛과 색을 다루는 수학을 가르친 사람이었어요.
디드로는 이 실존했던 맹인 수학자가 숨을 거두는 장면을 상상으로 그립니다.
곁에 있던 목사가 이렇게 질서 정연한 세상을 보면 신이 계심을 믿지 않겠느냐고 권합니다.
세상이 이토록 아름답게 설계돼 있으니 설계자가 있지 않겠냐는, 당시 흔한 신 증명이었죠.
그런데 손더슨은 평생 그 '아름다운 세상'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그가 아는 세상은 손끝에 닿은 것들뿐이에요.
디드로가 그리는 손더슨은 이렇게 되받는 취지로 말합니다.
당신 눈에 보이는 질서를 나에게 증거로 들이대지 말라고, 정말 신을 믿게 하고 싶다면 그를 만질 수 있게 해 달라고요.
눈에 보이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신의 증거로 삼는 논리는, 애초에 볼 수 없는 사람에겐 통하지 않습니다.
디드로는 이 장면을 통해 조심스럽게, 그러나 분명하게 말한 거예요.
신에 대한 믿음도 결국 우리가 가진 감각이 빚어낸 것일 수 있다고요.
이런 이야기는 당시 프랑스에서 그냥 넘어갈 수 없었습니다.
신을 감각의 산물처럼 다루고, 신 존재 증명을 앞 못 보는 사람 한 명으로 무너뜨리는 책이었으니까요.
당국은 이 익명의 편지를 강하게 탄압했고, 저자가 디드로라는 게 드러났습니다.
1749년 7월 24일, 디드로는 체포돼 파리 근교의 뱅센 성에 갇혔습니다.
약 102일 뒤인 11월 3일에 풀려났는데, 갇혀 있는 동안 유일하게 손에 쥘 수 있던 책은 밀턴의 서사시 『실낙원』 한 권뿐이었어요.
종이도 펜도 없던 그는 이쑤시개를 펜 삼고, 벽의 판석을 긁어낸 가루를 포도주에 개어 잉크를 만들어 책 여백에 생각을 적었다고 합니다.
감옥조차 그의 머릿속을 멈추지 못한 셈이죠.
이 사건은 디드로에게 평생 잊지 못할 경험을 남겼습니다.
생각을 글로 옮기는 일이 감옥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걸 몸으로 배운 거예요.
그래서 이후 그의 가장 대담한 글 상당수는 살아 있는 동안 세상에 내지 않고, 서랍에 넣어 두었다가 죽은 뒤에야 출판됩니다.
『맹인에 관한 편지』는 얇지만 디드로라는 사람의 출발점을 다 담고 있습니다.
짚을 점을 세 가지로 묶어 볼게요.
눈이 보이는 사람들을 위해 쓴, 앞 못 보는 사람에 관한 편지.
제목의 뒤집힌 구조 자체가 이 책의 메시지였습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이 사실은 우리가 가진 감각 위에 세워진 것일 뿐이라고요.
0
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