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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교황청의 이단 단죄는 피코가 1486년 로마에서 열려던 900개 명제 대토론을 교황이 멈춰 세우고, 그 명제들을 이단으로 판정해 통째로 금지한 사건이에요. 인쇄된 책 한 권을 교회가 전면 금지한 최초의 사례이기도 했어요.
피코 델라 미란돌라(1463년~1494년)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젊은 귀족 철학자였어요.
스물세 살이던 1486년 12월, 그는 철학·신학·카발라를 한데 엮은 900개의 명제를 『Conclusiones philosophicae, cabalasticae et theologicae』(철학·카발라·신학의 결론들)라는 제목으로 펴냈어요.
그러고는 이듬해 1월 6일 주현절에 로마에서 누구든 와서 반박해 보라며 공개 토론을 열겠다고 선언했죠.
멀리서 오는 학자들의 여비까지 자기 돈으로 대주겠다고 했으니, 자신감이 대단했어요.
그런데 이 토론은 끝내 열리지 못했어요.
1487년 2월, 교황 인노첸시오 8세가 토론을 중단시키고 900개 명제가 정통 교리에 맞는지 심사할 위원회를 세웠거든요.
큰 대회를 열겠다고 초대장을 다 돌렸는데, 심판이 대회 자체를 취소해 버린 셈이에요.
'피코가 로마에서 유럽 학자들과 대토론을 벌였다'는 이야기가 돌지만, 사실 그 토론은 한 번도 열리지 않았어요.
위원회는 처음엔 900개 중 13개 명제만 문제 삼았어요.
하지만 조사가 이어지면서 결국 900개 전부가 단죄됐어요.
몇 개가 문제였는지는 자료마다 조금씩 다르게 전해지는데, 가장 널리 인정되는 영어권 기록은 처음 13개에서 최종적으로 900개 전부로 늘었다고 봐요.
1487년 8월 4일 교황의 교서로 이단 판정이 못 박혔어요.
단죄된 명제 가운데 하나가 이런 내용이었어요.
유한한 시간 안에 지은 큰 죄는 영원한 벌이 아니라 잠깐의 벌만 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이었죠.
쉽게 말하면 '영원한 지옥은 지나치다'는 주장이라, 당시 교회 가르침과 정면으로 부딪쳤어요.
이런 대목들 때문에 후대 사람들은 피코를 종교개혁을 앞서간 '원형 프로테스탄트'라고 부르기도 해요.
피코는 가만있지 않았어요.
1489년, 자기 명제를 지키려고 후원자 로렌초 데 메디치에게 바치는 변론서 『Apologia』(변론)를 썼어요.
억울함을 조목조목 풀어낸 반박문이었죠.
그런데 이게 오히려 사태를 키웠어요.
교황은 이미 단죄한 내용을 담은 이 글을 피코가 여기저기 돌린 것을 문제 삼아 종교재판소를 세웠고, 피코는 이 변론서마저 철회해야 했어요.
결국 『Apologia』는 거의 모든 사본이 불태워졌어요.
이렇게 900개 명제와 변론서는 인쇄된 책을 교회가 전면 금지한 최초의 사례가 됐어요.
갓 태어난 인쇄술이 처음으로 '금서'라는 벽에 부딪친 순간이었던 거예요.
궁지에 몰린 피코는 1488년 프랑스로 몸을 피했어요.
하지만 교황 사절의 요청으로 사보이 공작 필리프 2세에게 붙잡혀 뱅센 감옥에 갇히고 말았죠.
다행히 로렌초 데 메디치가 앞장선 이탈리아 여러 제후들의 중재로, 프랑스 왕 샤를 8세가 그를 풀어줬어요.
그래도 교황의 견책과 제약이 완전히 사라진 건 한참 뒤였어요.
1493년, 로드리고 보르자가 알렉산데르 6세로 새 교황이 되고 나서야 피코는 비로소 자유로워졌어요.
명제를 내건 1486년부터 따지면 7년 만이었죠.
스스로 벼려낸 900개의 문장이 그를 유럽 최고의 화제 인물로 만들어 준 동시에, 감옥과 금서의 굴레로도 이끈 셈이에요.
교황청의 이단 단죄는 피코가 준비한 900개 명제 대토론이 열리지도 못한 채 교황 손에 멈춰 서고, 그 명제들이 이단으로 판정돼 통째로 금지된 사건이에요.
처음 13개에서 결국 900개 전부로 번졌고, '영원한 벌은 지나치다'는 명제처럼 당대 교리와 충돌하는 대목이 문제였어요.
변론서 『Apologia』까지 불태워지며 인쇄된 책을 교회가 처음으로 전면 금지했고, 피코는 감옥과 도피를 거쳐 1493년 새 교황 아래에서야 풀려났어요.
한 청년의 지적 야심이 교회의 경계선을 얼마나 아슬아슬하게 건드렸는지 보여 주는 장면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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