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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피코에게 카발라는 세계의 숨은 뜻을 풀어내는 지혜였고, 마술은 주문 외우기가 아니라 자연 밑에 깔린 상징과 수의 구조를 읽어 그 안에서 작용하는 일이었어요. 이성으로는 흐릿하게만 보이는 세계에서 가장 큰 빛을 끌어내려는 시도였죠.
피코 델라 미란돌라는 1463년에 태어나 1494년에 세상을 떠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젊은 귀족이자 철학자예요.
오늘은 그의 여러 생각 가운데 딱 하나, '카발라와 마술'만 좁게 들여다볼게요.
카발라는 원래 유대교의 신비주의 전통이에요.
글자와 숫자 하나하나에 숨은 뜻이 있다고 보고 성경을 깊이 파고드는 방식이죠.
피코는 페루자에 머물 때 여기에 입문했어요.
그에게 카발라는 세계의 신비를 해독하는 지혜의 원천이었고, 마술은 그 지혜와 짝을 이루는 실천이었어요.
핵심만 먼저 말하면, 피코의 마술은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검은 마법이 아니라 자연 속에 감춰진 상징과 수학적 질서를 읽어내는 지적인 작업이었답니다.
피코는 신이 이성만으로는 닿을 수 없도록 일부러 모호하게 나타난다고 봤어요.
안개 낀 유리창 같은 거죠.
안이 흐릿하게만 보여서 답답할 수 있는데, 피코는 오히려 그 모호함에서 사람이 가장 큰 빛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믿었어요.
흐릿함이 벽이 아니라 오히려 깊이 파고들라는 초대장인 셈이에요.
다만 피코가 읽은 카발라 문헌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어요.
그가 크게 의존한 번역은 배교자이자 위조자였던 플라비우스 미트리다테스의 손을 거친 것이었는데, 원래 유대교 문헌을 친기독교적으로 가공한 텍스트였거든요.
그러니 피코가 만난 카발라는 이미 기독교 쪽으로 손질된 버전이었던 거예요.
그의 카발라 스승 중 한 사람인 랍비 요하난 알레만노는 마술의 습득과 통달이 지적·영적 교육의 마지막 단계라고 가르쳤어요.
카발라로 세계를 읽는 공부의 맨 끝에 마술이 놓여 있었던 셈이죠.
'마술'이라는 말에 지팡이를 휘두르고 주문을 외우는 장면부터 떠오른다면, 잠깐 내려놓아 주세요.
피코가 말한 마법사는 눈에 보이는 세계 너머의 절대적 실재를 상징과 은유를 통해 다루는 사람이에요.
요리를 예로 들어 볼게요.
좋은 요리사는 재료를 겉모습만 보지 않고 성질과 어울림까지 읽어내요.
피코의 마법사도 비슷해요.
자연에서 출발해서 그 밑을 떠받치는 상징과 은유의 토대, 곧 수학적 구조를 읽어내며 형이상학의 영역까지 올라가요.
그리고 거기서 가만히 구경만 하는 게 아니라 능동적으로 작용하려 했죠.
세계가 짜인 설계도를 읽고 그 흐름에 손을 얹는 일에 가까워요.
그래서 피코를 무서운 흑마술과 엮는 이야기는 조심해야 해요.
훗날 소설가 러브크래프트는 작품에서 피코를 '무서운 주문'의 출처로 언급했지만, 그 주문은 실제로는 피코가 죽고 수십 년 뒤에 나온 아그리파의 책에서 처음 등장한 것으로 보여요.
대중문화에서 흔한 잘못된 딱지 붙이기죠.
피코가 모든 신비한 것을 다 받아들인 건 아니에요.
특히 점성술은 두 갈래로 딱 나눠서 봤어요.
| 구분 | 수학적·사변적 점성술 | 심판적·예언적 점성술 |
|---|---|---|
| 다른 이름 | 오늘날의 천문학 | 운세를 점치는 점성술 |
| 하는 일 | 우주의 조화로운 질서를 앎 | 사람의 미래를 별자리에 맡김 |
| 피코의 평가 | 정당하다 | 비판한다 |
피코가 예언적 점성술을 싫어한 이유는 분명해요.
그것은 사람의 일(더 높은 것)을 천체의 배치(더 낮은 것)에 종속시키는 거꾸로 된 생각이거든요.
별이 내 운명을 미리 정해 버린다면 사람의 자유는 사라지고 말죠.
세계를 읽어 그 안에서 스스로 작용하려던 그의 마술과, 별에 인생을 맡겨 버리는 점술은 방향이 정반대였던 거예요.
피코는 흔히 크리스천 카발라 전통의 창시자로 꼽혀요.
유대교의 카발라를 기독교 신앙과 잇대려 한 이 시도는 근대 초 서구 밀교주의의 핵심 요소가 됐어요.
그가 1486년에 내놓은 900개의 테제도 제목부터 『철학적·카발라적·신학적 결론들(Conclusiones philosophicae, cabalasticae et theologicae)』이었으니, 카발라가 그의 사상 한복판에 있었던 셈이죠.
이 불씨를 이어받은 대표적인 인물이 독일 인문주의자 요하네스 로이힐린이에요.
피코의 카발라 교리는 그를 거쳐 계속 살아남았어요.
피코 자신은 플라톤주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 헤르메스 전통, 카발라를 한데 묶어 더 높은 종합으로 화해시키려 했는데, 그 커다란 그림 속에서 카발라와 마술은 세계의 숨은 결을 읽는 열쇠 노릇을 했답니다.
피코 델라 미란돌라의 카발라와 마술은 한마디로 '흐릿한 세계를 읽어내려는 지적인 도전'이었어요.
카발라는 신이 모호하게 감춰 둔 뜻을 푸는 지혜였고, 마술은 그 지혜를 이어받아 자연의 상징과 수학적 구조를 통해 세계에 작용하는 일이었죠.
주문이나 흑마법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사람의 자유를 빼앗는 예언적 점성술과는 정반대편에 있었다는 점만 기억하면, 피코가 왜 이 낯선 지혜에 그토록 매달렸는지 그림이 그려질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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