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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절대무(絶対無, zettai mu)는 '아무것도 없음'이 아니라, 모든 있음이 그 안에서 생겨나는 바탕을 가리켜요. 텅 빈 자리이기 때문에 오히려 무엇이든 담을 수 있는 것처럼, 스스로 자기를 비우면서 만물을 일어나게 하는 창조적인 근거예요.
연극 무대를 한번 떠올려 볼게요.
아무 배우도 없고 소품도 없는 텅 빈 무대는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여요.
그런데 바로 그 비어 있음 덕분에 어떤 장면이든 그 위에서 펼쳐질 수 있어요.
만약 무대가 이미 뭔가로 꽉 차 있다면, 새로운 이야기가 들어설 자리가 없겠지요.
일본 철학자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郎, 1870년부터 1945년까지)가 말한 절대무(絶対無, zettai mu)가 바로 이런 '비어 있어서 모든 것을 담는 바탕'이에요.
그는 순수경험과 장소(바쇼, 場所)라는 개념으로 동서양 철학을 잇고 교토학파(京都学派)를 연 사람인데, 그 사유가 마지막에 가 닿은 곳이 이 절대무예요.
여기서 '무(無)'는 '없음'이라는 글자를 쓰지만, 결코 텅 빈 결핍이나 부재를 뜻하지 않아요.
오히려 모든 것이 거기서 생겨나는 능동적이고 창조적인 근거를 가리켜요.
우리가 보통 '있다'고 말하는 것들은 다 무언가 정해진 모양을 가져요.
사과는 사과이고 돌은 돌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딱 정해진 것은 그 정해진 것 이외의 것은 될 수 없어요.
사과인 채로는 하늘이 될 수 없잖아요.
니시다는 모든 있음을 '그 안에' 품으려면, 정작 그 바탕 자신은 어떤 특정한 무언가여서는 안 된다고 봤어요.
특정한 색을 띠지 않은 빈 종이라야 어떤 그림이든 그릴 수 있는 것처럼요.
그래서 만물이 일어나는 궁극의 자리는 '있음'이 아니라 '무', 곧 절대무여야 한다고 말한 거예요.
니시다는 이 절대무가 '결정하는 자 없는 자기결정'으로 움직인다고 했어요.
말이 어렵지요?
쉽게 풀면, 뒤에서 조종하는 감독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세계가 스스로 자기 모습을 정해 간다는 뜻이에요.
그리고 그 방식이 '자기부정'이에요.
바탕이 자기 자신을 자꾸 비우고 물러섬으로써, 그 자리에 온갖 것이 생겨나요.
무대가 스스로를 텅 비워 두어야 배우가 올라올 수 있는 것과 같아요.
채우기 위해 비우는 것, 이것이 절대무가 작동하는 방식이에요.
'모든 것을 낳는 궁극의 바탕'이라고 하면, 세상 바깥에 있는 창조주나 거대한 힘을 떠올리기 쉬워요.
하지만 니시다의 절대무는 그런 게 아니에요.
절대무는 있음과 없음의 대립조차 넘어서지만, 그렇다고 세계 너머에 따로 서 있는 어떤 실체나 힘이나 의식을 가리키지 않아요.
세계와 동떨어진 무언가가 아니라, 만물이 일어나는 바로 그 '안'이에요.
니시다는 신(神)도 인격을 가진 초월적 존재로 보지 않았어요.
그가 만년에 인정했듯이, 자신이 말하는 절대는 상대(相對)를 전부 끌어안아요.
좋은 것뿐 아니라 악마적인 것까지 포함해서요.
그는 이런 생각이 자기에게 영감을 준 기독교보다 대승불교(大乗仏教) 전통에 더 가깝다고 밝혔어요.
재미있는 건 절대에 가까워질수록 오히려 나와 절대의 차이가 더 또렷해진다는 대목이에요.
니시다는 이를 역대응(逆対応, gyaku taiō)이라 불렀어요.
유한한 내가 죽음, 곧 자기부정을 마주할수록 나 자신을 더 예리하게 자각하게 된다는 거예요.
절대무 앞에서 내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 바로 그 자리에서 '나'가 더 선명해지는 셈이지요.
절대무를 처음 접하면 몇 가지 함정에 빠지기 쉬워요.
아래로 정리해 볼게요.
| 흔한 오해 | 니시다의 절대무 |
|---|---|
|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상태 | 모든 있음이 생겨나는 능동적 바탕 |
| 세계 바깥의 신·거대한 힘 | 만물이 일어나는 '그 안', 세계와 나뉘지 않음 |
| 소극적인 결여·부재 | 자기를 비워 만물을 낳는 창조적 근거 |
특히 첫 번째 오해를 조심해야 해요.
'무'라는 글자 탓에 그저 '없음'으로 읽으면 정반대가 돼요.
니시다에게 절대무는 소극적 결핍이 아니라, 자기를 비워 냄으로써 무언가를 있게 하는 적극적인 힘이에요.
이 점은 그의 철학을 소개하는 연구들도 유독 강조하는 부분이에요.
또 하나, 니시다의 글은 순서대로 결론을 향해 나아가는 논증서가 아니에요.
같은 물음을 나선처럼 되풀이하며 조금씩 깊이 파고드는 방식이라, 한 번에 완성된 체계로 읽으려 하면 오히려 길을 잃기 쉬워요.
절대무도 그렇게 여러 번 되짚으며 다가가야 조금씩 손에 잡혀요.
절대무(絶対無, zettai mu)는 '아무것도 없음'이 아니라 '모든 있음을 낳는 바탕'이에요.
텅 빈 무대가 어떤 연극이든 담아내듯, 특정한 무엇도 아니기에 오히려 만물을 그 안에 품을 수 있는 자리예요.
이 바탕은 감독 없이 스스로 정해 가고, 자기를 비우는 자기부정을 통해 세계를 일어나게 해요.
세계 바깥의 신이나 힘이 아니라 세계가 일어나는 바로 그 '안'이며, 절대에 가까워질수록 나는 사라지기는커녕 더 또렷해져요.
'없음'이라는 글자를 결핍으로 읽지 않는 것, 이 한 가지만 붙잡아도 니시다의 절대무는 훨씬 가까워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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