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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장소론은 무언가를 '무엇이다'라고 규정하기 전에, 그것이 '어디에 담겨 있는가'를 먼저 묻는 생각이에요. 모든 존재는 자기를 품는 더 큰 장소(場所, basho) 안에서 성립하고, 그 장소들을 끝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아무것으로도 규정되지 않는 절대무의 장소에 이른다는 것이죠.
어항 속 물고기를 떠올려 볼게요.
물고기는 물 안에 있고, 물은 어항 안에 있고, 어항은 방 안에 있어요.
무엇이든 '그것 자체'만 따로 떨어져 존재하지 않고, 반드시 무언가에 담겨 있죠.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郎, 1870년부터 1945년까지)가 1920년대 중반에 발전시킨 장소론(場所論, basho-ron)은 바로 이 '담기는 자리'를 철학의 중심에 놓은 생각이에요.
보통 우리는 '무엇이 있느냐'를 물어요.
니시다는 질문을 바꿔요.
'그것이 어디에서 있느냐', 즉 '무엇 안에서 그것이 나타나느냐'를 먼저 물은 거예요.
사물을 하나의 알맹이로 보지 않고, 그 사물이 떠오르는 배경 전체를 먼저 봐요.
그래서 장소론은 존재를 점(點)이 아니라 자리(場)로 바라보는 철학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이 발상은 뒷날 물리학자 유카와 히데키의 장(場) 이론에도 영감을 주었다고 평가돼요.
"장미는 빨갛다"라는 문장을 보죠.
여기서 '장미'는 주어, '빨갛다'는 술어예요.
우리는 보통 진짜 실재는 '장미'라는 물건이고, '빨갛다'는 거기에 붙은 성질일 뿐이라고 생각해요.
아리스토텔레스도 이렇게, 주어는 되지만 결코 술어는 될 수 없는 개별 실체를 히포케이메논(hypokeimenon)이라 부르며 실재의 바탕으로 삼았어요.
니시다는 이 관계를 뒤집어요(『働くものから見るものへ』, 1927년).
진짜 바탕은 개별 물건이 아니라, 그것이 나타나는 '술어의 자리'라는 거예요.
빨간 장미가 보이려면 먼저 '빨강이 떠오를 수 있는 마음의 장'이 있어야 하잖아요.
그 장이 바로 의식이고, 니시다는 이를 '초월론적 술어'라고 불러요.
어떤 물건도 결국 더 큰 자리 안에 담겨서만 무엇이 되니까, 끝까지 담기만 하고 담기지 않는 최종의 자리가 있어야 한다는 거죠.
그 방향을 따라가는 것이 장소론이에요.
장소는 하나가 아니라 여러 층으로 포개져 있어요.
작은 자리가 더 큰 자리에 안기는 방식이죠.
어항이 방에, 방이 건물에 안기듯이요.
니시다는 이 층위를 아래와 같이 그렸어요.
| 장소의 층 | 무엇을 담는 자리인가 |
|---|---|
| 판단의 장소 | 술어가 주어를 감싸는 자리(빨강이 장미를 담음) |
| 의식의 장소 | 그 판단들이 떠오르는 마음 |
| 자각의 장소 | 그 마음이 스스로를 비추는 자리 |
| 가지적 세계 | 참·선·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창조적 자기의 자리 |
| 절대무의 장소 | 이 모든 것을 품는 궁극의 자리 |
위로 갈수록 더 넓게 감싸는 자리예요.
재미있는 건 맨 마지막 자리인 절대무(絶対無, zettai mu)에 이르면, 그것을 다시 담아 줄 바깥이 없다는 점이에요.
그래서 이 자리는 '무엇이다'라고 규정될 수 없어요.
규정하려면 그것을 담는 더 큰 자리가 또 필요할 테니까요.
규정 바깥에 있다는 뜻에서 '무(無)'라고 부른 거예요.
여기서 오해하기 쉬워요.
'무'라고 하면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상태를 떠올리기 쉽죠.
하지만 니시다의 절대무는 결핍이나 부재가 아니에요.
오히려 모든 것이 거기에서 생겨나는 능동적이고 창조적인 바탕이에요.
스크린이 텅 비어 있기 때문에 어떤 영화든 비출 수 있는 것처럼, 아무 규정도 없는 자리이기에 온갖 존재를 담아낼 수 있는 거죠.
이 절대무, 그리고 니시다 초기의 순수경험(純粋経験, junsui keiken)이 각각 무엇인지는 그 자체로 큰 주제라 다른 글에서 따로 다룰게요.
여기서는 장소론이 '존재를 담는 자리'를 층층이 거슬러 올라가 마침내 규정 너머의 자리에 닿는 사유라는 점만 기억하면 충분해요.
니시다는 서양의 칸트·헤겔을 자주 인용하면서도 『장자』나 불교 문헌의 사유를 바탕에 깔아, 동양과 서양의 생각을 한자리에 포갠 교토학파(京都学派)의 창시자로 불려요.
장소론은 '무엇이 있는가'가 아니라 '무엇 안에서 있는가'를 묻는 철학이에요.
물고기가 물 없이 살 수 없듯, 어떤 존재도 자기를 담는 자리 없이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본 거죠.
니시다는 주어보다 그것을 감싸는 술어의 자리를 실재의 바탕으로 뒤집었고, 판단에서 의식으로, 다시 자각으로, 층층이 넓어지는 장소를 거슬러 올라갔어요.
그 끝에 어떤 규정으로도 담을 수 없는 절대무의 장소가 있다고 보았고요.
존재를 알맹이가 아니라 자리로 바라본 이 시선을, 다음에 니시다의 글을 만날 때 한 번 떠올려 보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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