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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사티는 남편이 죽으면 살아 있는 아내를 장작더미에 함께 태우던 인도의 옛 관습이에요. 람모한 로이는 이게 힌두교의 참뜻이 아니라 잘못 굳어진 미신이라고 조목조목 따졌고, 1829년 마침내 이걸 법으로 금지시키는 데 앞장섰어요.
옛날 인도에는 '사티(Sati)'라는 관습이 있었어요.
남편이 죽어 그 시신을 화장하는 장작더미 위에, 살아 있는 아내까지 함께 올려 불태우는 일이었어요.
지금 우리가 들으면 도저히 믿기 힘든 이야기지만, 당시에는 이걸 '더없이 위대한 정절'이라며 오히려 떠받드는 분위기가 있었어요.
사티를 행하는 여인을 둘러싸고 사람들이 "Maha Sati! Maha Sati! Maha Sati!"—'위대한 열녀여!'라고 외칠 정도였죠.
반 친구 한 명이 잘못된 규칙 때문에 억울한 일을 당하는데, 주변 어른들이 오히려 박수를 친다고 상상해 보세요.
말리고 싶어도 다들 '원래 그런 거야'라고 하면 얼마나 답답할까요.
람모한 로이(1772년~1833년)는 산스크리트어와 페르시아어, 영어에 두루 능통했던 인도의 학자이자 사회개혁가였는데, 바로 이 답답함을 평생의 싸움으로 바꾼 사람이에요.
로이에게 사티는 책에서만 읽은 먼 이야기가 아니었어요.
그는 어린 시절, 자기 형수가 사티로 죽는 장면을 두 눈으로 직접 봤어요.
열일곱 살이던 형수는 장작더미로 끌려갔고, 로이가 항의해 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어요.
어린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죠.
한 번 마음에 깊이 박힌 장면은 쉽게 지워지지 않아요.
로이는 이 기억을 원망으로만 남겨 두지 않고, '어떻게 하면 이 관습을 진짜로 없앨 수 있을까'라는 오랜 질문으로 바꿔 갔어요.
참고로 그의 집안은 다처혼과 지참금 문제로 악명 높던 쿨린 브라만 계급이었는데, 그는 이 두 관행에도 함께 반대하는 운동을 벌였어요.
여성을 옭아매는 관습 전체와 맞선 셈이에요.
로이의 무기는 감정만이 아니었어요.
그는 산스크리트어로 베다와 우파니샤드 같은 힌두교 경전을 직접 읽을 수 있는 학자였어요.
그래서 그는 사티를 반대하되, '힌두교가 나빠서'가 아니라 '힌두교의 참뜻이 이게 아니라서'라고 논리를 세웠어요.
그는 이렇게 말했어요.
"힌두교를 일그러뜨리는 미신적 관행들은 그것이 가리키는 순수한 정신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깨끗한 강물 위에 쓰레기가 떠다닌다고 해서 강물 자체가 더러운 건 아니잖아요.
쓰레기를 걷어 내야 강의 본모습이 보이죠.
로이에게 사티는 걷어 내야 할 쓰레기였고, 힌두교의 순수한 정신은 그 아래 흐르는 맑은 물이었어요.
1818년, 그는 이 생각을 담아 《산 채로 과부를 태우는 관습에 찬성하는 자와 반대하는 자의 대화》라는 책을 벵골어와 영어로 함께 펴냈어요.
제목처럼, 찬성과 반대 양쪽의 주장을 맞세워 놓고 하나씩 반박하는 방식이었어요.
| 사티를 옹호하는 쪽 | 로이가 맞선 논리 |
|---|---|
| 경전이 시키는 신성한 의무다 | 경전의 참뜻은 그게 아니다, 잘못 굳어진 미신이다 |
| 여인의 위대한 정절이다 | 강요된 죽음은 정절이 아니라 폭력이다 |
로이는 글만 쓴 게 아니라 사람들을 모았어요.
1818년에는 청원 운동을 조직해, 인도를 다스리던 영국 식민 당국에 사티를 폐지해 달라고 정식으로 요구했어요.
혼자 외치는 목소리를 여럿의 서명으로 바꿔, 무시할 수 없는 힘으로 만든 거예요.
그 노력은 열매를 맺었어요.
1829년, 윌리엄 벤팅크 총독이 '벵골 사티 규제법'을 만들어 사티를 법으로 금지했어요.
하지만 로이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어요.
어렵게 만든 법도 반대 세력에 밀려 뒤집힐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그는 1830년, 이 법이 되돌려지지 않도록 지키려고 무굴 황제의 사절 자격으로 직접 영국까지 건너갔어요.
한 번의 승리로 끝내지 않고, 그 승리를 끝까지 지켜 낸 사람이었죠.
사티는 남편을 잃은 아내를 산 채로 태우던 인도의 옛 관습이었어요.
람모한 로이는 어린 시절 형수의 죽음을 목격한 뒤, 이 관습과 평생 맞섰어요.
그가 택한 방법은 세 가지로 기억하면 좋아요.
첫째, 경전을 직접 읽어 '이건 힌두교의 참뜻이 아니라 미신'이라고 논리로 따졌고, 둘째, 1818년 책과 청원으로 여론을 모았으며, 셋째, 1829년 금지법이 만들어진 뒤에도 영국까지 가서 그 법을 지켰어요.
로이는 강물 위 쓰레기를 걷어 내 본래의 맑은 물을 되찾으려 한 사람이었고, 사티 폐지 투쟁은 그렇게 한 걸음씩 나아간 긴 싸움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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