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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정약용은 사람의 본성을 정해진 이치가 아니라 '무언가를 좋아하는 마음의 기울기', 곧 기호(嗜好)로 봤어요. 우리 본성은 태어날 때부터 착한 일을 좋아하고 나쁜 일을 부끄러워하는 쪽으로 기울어 있다는 뜻이에요.
강진에서 18년 유배 살이를 하는 동안 정약용은 공자·맹자의 원래 뜻으로 돌아가려 애썼어요.
그 과정에서 내놓은 것이 성기호설(性嗜好說)이에요.
어려워 보이지만 핵심은 딱 한 줄이에요.
"성(性)은 기호(嗜好)다."
여기서 성은 사람의 본성, 기호는 '무언가를 좋아하는 마음'을 뜻해요.
기호가 뭔지는 입맛을 떠올리면 쉬워요.
누구는 매운 걸 좋아하고 누구는 단 걸 좋아하죠.
그건 머릿속에 든 지식이 아니라, 몸과 마음이 저절로 그쪽으로 끌리는 '기울기'예요.
정약용은 사람의 본성도 꼭 이 입맛 같다고 봤어요.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착한 일을 하면 마음이 흐뭇하고, 나쁜 일을 하면 부끄러워지는 쪽으로 기울어 있다는 거예요.
당시 주류였던 성리학(주자학)은 "성은 곧 이치다"라고 가르쳤어요.
사람 마음속에 하늘이 준 완성된 이치가 이미 다 들어 있다는 생각이죠.
그런데 정약용이 보기엔 이 설명이 붕 떠 있었어요.
이치가 처음부터 다 갖춰져 있다면, 우리는 그걸 가만히 들여다보고 지키기만 하면 되니까요.
정약용은 그런 태도를 걱정했어요.
그는 이렇게 적었어요.
"古學用力在行事…今學用力在養心,以養心至廢事故也。"
옛 학문은 '일을 행하는 데' 힘썼는데, 요즘 학문은 '마음 기르는 데'만 힘쓰다 결국 해야 할 일을 내팽개치게 됐다는 뜻이에요.
마음속 이치만 들여다보다 정작 세상일을 안 하게 된다는 거죠.
그래서 그는 본성을 다시 그렸어요.
| 물음 | 성리학(주자학) | 다산의 성기호설 |
|---|---|---|
| 본성이란? | 하늘이 준 완성된 이치 | 착함을 좋아하는 마음의 기울기 |
| 착함은? | 본래 다 갖춰진 것 | 좋아하는 쪽으로 실천해 이루는 것 |
이치는 이미 끝난 것이지만, 기호는 아직 실천을 기다리는 출발점이에요.
정약용이 본성을 기호로 바꿔 부른 데는 이런 속뜻이 있었어요.
정약용은 이 '좋아함'이 한 종류가 아니라고 봤어요.
하나는 몸이 좋아하는 것이에요.
맛있는 음식, 따뜻한 잠자리, 편한 것을 좋아하는 마음이죠.
동물도 가진 좋아함이에요.
다른 하나는 마음이 좋아하는 것이에요.
옳은 일을 하면 뿌듯하고, 남을 도우면 기분이 좋아지는, 착함 그 자체를 좋아하는 마음이죠.
이건 사람만 가진 좋아함이에요.
문제는 이 둘이 자주 부딪친다는 거예요.
몸은 편한 쪽으로 끌리고 마음은 옳은 쪽으로 끌리니까요.
시험 앞에서 놀고 싶은 마음과 공부해야 한다는 마음이 싸우는 것과 똑같아요.
정약용이 보기에 인간다움은 바로 이 갈림길에서 착함을 좋아하는 쪽을 스스로 고르는 데 있었어요.
다만 그 '스스로 고르는 힘'은 자주지권이라는 다른 이야기라 여기선 접어 둘게요.
성기호설의 진짜 무게는 여기에 있어요.
본성이 '착함을 좋아하는 기호'일 뿐이라면, 좋아하는 것만으로는 아직 착한 사람이 아니에요.
단 걸 좋아한다고 요리사가 되는 게 아니듯, 착함을 좋아한다고 저절로 어진 사람이 되진 않으니까요.
좋아하는 마음을 실제 행동으로 옮겨야 비로소 덕이 완성돼요.
정약용은 어짊(仁)마저 이렇게 봤어요.
"仁者非本心之全德,亦事功之所成耳。"
'어짊이란 본래 마음에 갖춰진 온전한 덕만이 아니라, 실제로 해낸 일(事功)을 통해서도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뜻이에요.
마음속에 착함이 씨앗처럼 심겨 있다 해도, 물을 주고 길러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거죠.
성기호설은 결국 본성을 '이미 완성된 도덕'이 아니라 '착함을 향해 부지런히 걸어가라는 출발선'으로 본 셈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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