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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다산 정약용의 탈성리학적 경전 해석은, 주자(주희)가 덧입힌 성리학의 형이상학 틀을 벗기고 공자·맹자의 원래 뜻으로 돌아가서, 경전을 '마음속 수양'이 아니라 '실제로 하는 일'로 읽어야 한다고 본 태도예요. 같은 책을 놓고도 어디에 힘을 주느냐가 달라진 거죠.
먼저 아주 쉽게 비유해 볼게요.
여러분이 오래된 요리책 한 권을 물려받았다고 해봐요.
그런데 앞선 어떤 요리사가 그 책 여백마다 자기 해석을 잔뜩 적어 놓았어요.
"이 재료는 사실 우주의 기운을 뜻한다" 같은 식으로요.
세월이 지나자 사람들은 원래 요리법보다 그 여백의 주석을 더 중요하게 여기게 됐어요.
조선의 유학이 딱 그랬어요.
공자·맹자의 경전을 읽을 때, 송나라 학자 주자가 붙인 성리학적 해석을 정답처럼 따랐거든요.
성리학은 세상 만물에 '이(理)'라는 원리가 있고, 사람은 마음을 갈고닦아 그 이치와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보는 학문이에요.
다산 정약용(1762~1836)은 이 여백의 주석을 걷어내고, 요리책 본문 자체, 곧 공자·맹자의 원래 말로 돌아가려 했어요.
이게 바로 탈성리학적 경전 해석이에요.
다산은 자기 학문에 이름을 붙였는데, '수사학(洙泗學)'이라고 불렀어요.
수사는 공자의 고향을 흐르던 두 강, 수수(洙水)와 사수(泗水)에서 딴 말이에요.
쉽게 말하면 "공자가 살던 그 자리로 직접 돌아가서 배우겠다"는 선언이죠.
후대 학자의 두꺼운 주석을 거치지 말고, 원산지에서 곧장 물을 떠 마시겠다는 태도예요.
왜 그랬을까요?
다산이 보기에 당시 학문은 지나치게 머릿속 생각에만 갇혀 있었어요.
세상은 백성이 굶고 관리가 부패한 현실인데, 학자들은 마음의 이치를 따지는 논쟁에만 매달렸거든요.
그래서 다산은 경전을 새로 읽으면, 유학 본래의 관심이 '내 마음 다스리기'가 아니라 '세상에서 실제로 하는 일'에 있었다는 걸 되살릴 수 있다고 봤어요.
다산의 문제의식이 가장 또렷하게 드러난 문장이 있어요.
원문을 그대로 옮기면 이래요.
古學用力在行事,而以行事爲治心;今學用力在養心,以養心至廢事故也。
풀이하면 "옛 학문은 힘씀이 일을 행하는 데 있어서 그 행함(行事)으로 마음을 다스렸는데, 오늘날 학문은 힘씀이 마음을 기르는 데 있어서 오히려 그 마음 기르기(養心) 때문에 일을 폐하게 되었다"는 뜻이에요.
표로 나란히 놓으면 차이가 분명해져요.
| 구분 | 힘주는 곳 | 결과 |
|---|---|---|
| 옛 학문(다산이 되살리려는 것) | 일을 행함(行事) | 행동을 통해 마음이 닦임 |
| 당대 학문(성리학) | 마음을 기름(養心) | 마음에만 골몰해 할 일을 놓침 |
비유하자면, 착한 사람이 되는 길이 두 갈래인 셈이에요.
하나는 방에 앉아 "나는 착하다, 착하다" 되뇌며 마음을 닦는 길, 다른 하나는 밖에 나가 이웃을 돕는 일을 하다 보니 착해지는 길이죠.
다산은 두 번째가 공자의 원래 뜻이라고 읽었어요.
이 관점은 유학의 가장 중요한 말인 '인(仁)', 곧 어짊을 다시 읽게 만들어요.
성리학에서는 인을 '본래 마음이 지닌 온전한 덕'으로 봤어요.
태어날 때부터 마음 안에 갖춰진 완성품 같은 거죠.
그런데 다산은 이렇게 말해요.
仁者非本心之全德,亦事功之所成耳。
"어짊이란 본래 마음의 온전한 덕만이 아니라, 실제 사업(事功)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일 뿐이다"라는 뜻이에요.
인이 마음속에 미리 들어 있는 게 아니라, 부모를 실제로 섬기고 이웃을 실제로 도울 때 그 행동 속에서 만들어진다고 본 거예요.
다시 비유하면, 성리학은 인을 이미 완성된 보석처럼 마음 안에 품고 있다고 봤어요.
다산은 인을 벽돌 쌓기에 비유한 셈이에요.
벽돌 한 장 한 장 실제로 쌓아야 집이 서듯, 어진 행동을 실제로 해야 어짊이 이루어진다는 거죠.
같은 글자 하나를 두고, 마음의 상태냐 행동의 결과냐로 해석이 완전히 갈린 거예요.
다산 정약용의 탈성리학적 경전 해석은 세 가지로 기억하면 좋아요.
첫째, 주자가 덧입힌 성리학 주석을 걷어내고 공자·맹자의 원래 자리로 돌아가려 했고, 그 태도를 수사학이라 불렀어요.
둘째, 학문의 힘을 '마음 기르기(養心)'가 아니라 '일을 행함(行事)'에 두어야 한다고 봤어요.
셋째, 그래서 어짊(仁)조차 마음속 완성품이 아니라 실제 행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다시 읽었어요.
한마디로, 같은 경전을 머릿속이 아니라 두 손과 두 발로 읽어낸 해석이었던 셈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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