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 좀 가리지 마라디오게네스
햇빛 좀 가리지 마라디오게네스
1937년 겨울, 암도 지방의 작은 마을 탁체르에 낯선 여행자 몇 명이 찾아왔다.
그들은 낡은 여행자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승려들이었다.
라사에서 수천 리를 달려온 수색대였다.
그들이 찾는 것은 사람이었다.
정확히는, 한 영혼이었다.
티베트 불교의 전통에서 달라이 라마는 죽지 않는다.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난다.
수색대의 임무는 그 환생한 아이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단서는 이전 달라이 라마가 남긴 예언, 화장 후 연기가 흐른 방향, 그리고 몇 가지 징표들이었다.
농가 안에는 라모 턴둡이라는 두 살짜리 아이가 있었다.
수색대는 신분을 숨긴 채 들어갔다.
그러고는 물건들을 바닥에 펼쳤다.
선대 달라이 라마가 쓰던 유품과 비슷하게 생긴 가짜 물건들 사이에 진짜를 섞어 놓았다.
아이는 진짜 유품을 골랐다.
수색대는 세 차례 시험을 반복했다.
매번 아이는 통과했다.
방 안 어른들의 눈이 마주쳤을 것이다.
그 눈빛이 어땠는지는 기록에 없다.
하지만 그들이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는 것은 기록되어 있다.
두 살짜리 농부의 아들은, 그렇게 티베트의 영적 지도자가 되었다.
아이는 라사로 옮겨져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철학, 논리학, 의학, 시, 천문학.
그리고 그 모든 공부가 채 끝나기도 전에, 역사가 그를 불러냈다.
1950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티베트 동부 참도를 점령했다.
티베트는 선택해야 했다.
다음 달라이 라마의 즉위는 원래 성인이 되어야 가능했다.
하지만 국가가 위기에 빠졌을 때 정신적 지도자가 공석일 수는 없었다.
열다섯 살의 소년은 긴급 즉위했다.
국가원수가 되었다.
그로부터 4년 뒤인 1954년, 소년은 베이징으로 갔다.
마오쩌둥을 직접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 만남이 어떤 분위기였을지를 짐작할 수 있는 문장이 하나 남아 있다.
회담 중 마오는 달라이 라마에게 말했다.
"종교는 독이다."
그 말을 열다섯에 들었다면, 당신은 어떻게 했겠는가.
달라이 라마는 그 말을 기억했다.
수십 년 뒤에도.
1959년 3월은 빠르게 무너졌다.
중국 당국이 달라이 라마를 군 막사로 호출하겠다는 소문이 라사 시내에 퍼졌다.
이유는 불분명했다.
하지만 시민들은 즉각적으로 움직였다.
3월 10일 아침, 노르불링카 궁 주변에 수만 명의 시민이 모였다.
누가 조직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모인 것이었다.
그들은 궁 주변을 둘러싸고 인간 장벽을 만들었다.
달라이 라마가 나가지 못하도록 막은 것이 아니었다.
외부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은 것이었다.
중국군의 포격 준비 징후가 포착되었다.
달라이 라마의 참모들은 탈출을 결정했다.
그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3월 17일 밤.
달라이 라마는 군인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 어둠 속으로 걸어 나갔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궁 밖에 서 있는 수만 명의 시민들 사이를 통과했다.
그들은 몰랐다.
그 군인이 자신들이 지키려 했던 사람이라는 것을.
이후 14일간 히말라야를 넘었다.
말을 타고, 걷고, 강을 건넜다.
인도 땅에 발을 디뎠을 때, 그는 스물넷이었다.
라사에서 포격이 있었다.
궁 주변에 모여 있던 시민들 중 수천 명이 사망했다.
인도는 망명자들을 받아들였다.
히말라야 기슭의 작은 도시 다람살라가 새로운 거점이 되었다.
1960년, 달라이 라마는 이곳에 망명정부를 수립했다.
국가가 없는 정부였다.
영토가 없는 행정 조직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헌법을 기초했다.
망명 의회 선거를 실시했다.
8만여 명에 달하는 난민 아이들을 위한 학교 체계도 만들었다.
티베트어, 티베트 역사, 티베트 문화.
나라 밖에서 나라를 지키려는 시도였다.
그리고 1963년, 헌법 초안에 한 조항이 포함되었다.
달라이 라마 자신을 탄핵할 수 있는 조항이었다.
이 조항을 넣은 사람은 달라이 라마 본인이었다.
티베트 역사에서 달라이 라마는 400여 년 동안 종교 지도자인 동시에 정치 지도자였다.
그 전통 안에서 지도자가 스스로 자신의 권한을 제한하는 조항을 헌법에 집어넣은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하지만 그 조항은 남아 있다.
1989년 12월, 오슬로의 시청 강당에 달라이 라마가 섰다.
노벨 평화상 수상 연설이었다.
청중 앞에서 그는 중국에 대해 말했다.
침략자, 식민 지배자, 수만 명을 죽인 군대.
어떤 단어를 쓸 수도 있었다.
그는 이렇게 불렀다.
"인내를 가르쳐준 스승."
이것은 수사가 아니었다.
그해 초 중국이 천안문 광장에서 자국 시민들에게 탱크를 몰았다.
세계가 그 장면을 보았다.
달라이 라마는 그 장면을 보며 중국 정부를 '스승'이라고 불렀다.
그의 노선도 그 방향이었다.
티베트 독립을 요구하는 대신, 그는 중도 접근법을 공식화했다.
완전한 독립이 아닌, 진정한 자치.
충돌이 아닌 대화.
이 노선은 지지자들에게도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왜 더 강하게 싸우지 않느냐고.
왜 타협하느냐고.
달라이 라마는 그 질문에 직접 답하지 않았다.
대신 계속 같은 방향으로 걸었다.
그리고 2011년, 그는 다시 한번 전례 없는 결정을 내렸다.
400년 넘게 이어온 달라이 라마의 정치 권력 전통을 스스로 끊었다.
정치적 권한을 민선 지도자에게 완전히 이양했다.
마오쩌둥이 "종교는 독이다"라고 말한 것은 1954년이었다.
그 말을 들은 열다섯 살 소년은, 57년 뒤 스스로 권좌에서 내려왔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이미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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