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 좀 가리지 마라디오게네스
햇빛 좀 가리지 마라디오게네스
암도(Amdo) 는 티베트 동북부의 고원 지대다.
바람이 멈추지 않는 곳이고, 지평선까지 이어지는 초원에 양 떼가 흩어져 있는 곳이다.
1357년, 그 평원 어딘가의 가정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이름은 나중에 붙여질 것이었다.
아이가 두 돌을 넘기기도 전에 소문이 퍼졌다.
어떤 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결과는 명확하다.
세 살이 된 아이는 당시 티베트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종단 가운데 하나인 까규파(Kagyu)의 수장, 카르마파 4세 롤뻬도르제(Rolpai Dorje) 앞에 세워졌다.
거기서 아이는 재가계(在家戒)를 받았다.
세 살짜리가 계를 받는다는 것이 낯설게 들린다면,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다.
유럽 중세에 귀족 집안 아이가 일곱 살에 기사 수련을 시작했듯, 티베트에서 종교적 잠재력이 있다고 여겨진 아이는 아주 이른 나이에 그 길로 들어섰다.
계를 받는다는 것은 그 방향을 공식화하는 일이었다.
아이에게는 돈둡룩파(Döndrub Rinchen) 라는 법명이 붙었다.
그 뒤 아이는 지역의 한 스승 밑에서 초보적인 가르침을 받으며 자랐다.
열 살 무렵에는 사미계(沙彌戒)를 받고 정식 수련 승려가 됐다.
그리고 열여섯 살이 됐을 때, 그는 결정을 내렸다.
암도를 떠나겠다.
중앙 티베트로 가겠다.
당시 중앙 티베트는 불교 학문의 중심지였다.
사캬파(Sakya), 까규파, 닝마파(Nyingma) 등 여러 종파가 각자의 전통을 가르치는 사원들이 그곳에 있었다.
소년은 양 떼가 풀을 뜯는 고원을 뒤로하고,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가 나중에 쫑카파(Tsongkhapa) 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리라는 것을, 그때는 아무도 몰랐다.
'쫑카'는 그의 고향 마을 이름이다.
'카파'는 '~에서 온 사람'이라는 뜻이다.
쫑카에서 온 사람.
이름치고는 단순하다.
하지만 그 단순한 이름이 티베트 불교 역사에서 가장 많이 불리는 이름 중 하나가 됐다.
중앙 티베트에 도착한 소년은 곧 이상한 행동을 시작했다.
한 스승 밑에 정착하지 않았다.
사캬파 사원에 가서 논리학을 배웠다.
그 다음에는 까규파 스승을 찾아가 경전 해석을 들었다.
또 다른 사원으로 가서 율장(律藏), 즉 승단의 규율을 담은 텍스트를 공부했다.
중관(中觀) 철학 — 모든 현상에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사상 — 을 가르치는 스승이 있다면 며칠이고 걷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 순례가 대략 20년 가까이 이어졌다.
왜 그랬을까.
당시 티베트 불교계는 풍성하지만 동시에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여러 종파가 서로 다른 수행법과 철학을 가르쳤고, 같은 경전을 두고도 해석이 엇갈렸다.
어떤 사원에서는 밀교 수행(탄트라)을 현교(顯敎) 공부보다 먼저 강조했다.
쫑카파는 그 점을 불편하게 여겼다.
기초가 흔들리는 건물 위에 탑을 올리는 것.
그것이 그의 눈에 보인 문제였다.
그래서 그는 기초부터 다시 쌓으려 했다.
한 종파의 우물 안에 머무르지 않고, 모든 우물의 물을 직접 맛보는 방식으로.
이 시기에 쫑카파가 형성한 학문적 습관 하나가 있다.
주장을 받아들이기 전에 반드시 논리로 검증하는 것.
스승이 가르쳐줬다는 이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 가르침이 경전과 논리 양쪽에서 일관성을 갖는지 따졌다.
나중에 제자들이 쫑카파를 회고할 때 빠지지 않는 이야기가 이것이다.
가르침을 받은 뒤 혼자 방에 들어가 며칠씩 그것을 분해해 봤다는 이야기.
40대에 접어든 쫑카파는 쓰기 시작했다.
결과물은 티베트어로 《람림첸모(Lamrim Chenmo)》, 우리말로 옮기면 《보리도차제광론(菩提道次第廣論)》이다.
'람(Lam)'은 길, '림(Rim)'은 단계, '첸모(Chenmo)'는 크다는 뜻이다.
글자 그대로 하면 '깨달음으로 가는 길의 단계들, 그 광대한 논서'.
이 책의 배경을 이해하려면 잠깐 200년 전으로 거슬러가야 한다.
11세기 인도의 학승 아티샤(Atisha) 가 티베트로 건너와 《보리도등론(菩提道燈論)》이라는 짧은 책을 남겼다.
깨달음을 향한 수행의 순서를 도표처럼 정리한 책이었다.
짧고 명료했지만, 너무 짧아서 각 단계를 실제로 어떻게 닦아야 하는지는 스스로 채워야 했다.
쫑카파는 그 얇은 지도를 받아 들고, 등산 안내서를 썼다.
단순히 "이 산을 올라라"가 아니라, "여기서는 왼발을 어디에 딛고, 이 구간에서는 왜 쉬어야 하며, 저 능선에서 만나는 바람에는 이렇게 대비하라"는 식의 안내서.
그런데 《람림첸모》가 논쟁을 일으킨 것은 분량 때문이 아니었다.
핵심은 공성(空性) 해석이었다.
공성(śūnyatā) 은 티베트 불교 철학의 심장부다.
'모든 것은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명제.
그 자체는 여러 종파가 공유했다.
그러나 '그 명제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두고는 학파마다 달랐다.
쫑카파는 중관귀류논증파(Prāsaṅgika Madhyamaka) 의 해석을 택했다.
이 입장의 핵심은 대략 이렇다.
어떤 것도 그 자체로 성립하는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이 '책상'이라고 부르는 것은 나무와 못과 개념과 사용자가 모인 관계망 위에서 임시로 성립하는 것이지, 책상 자체에 '책상임'이라는 본질이 새겨져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당시 티베트에서 유행하던 다른 중관 해석들과 충돌했다.
일부 학자들은 쫑카파가 너무 나아갔다고 했다.
다른 이들은 그가 불교 전통을 인도 원전에 더 충실하게 복원했다고 했다.
논쟁은 수십 년간 이어졌다.
쫑카파가 살아있는 동안에도, 죽고 난 뒤에도.
쫑카파는 반론에 답하는 텍스트를 또 썼다.
그의 전집은 나중에 18권으로 편집됐다.
1409년 음력 1월, 라싸.
조캉 사원(Jokhang) 앞 광장에 승려들이 모였다.
수천 명이었다.
버터 등불이 줄지어 켜졌다.
사원 벽을 타고 빛이 번졌다.
쫑카파가 조직한 대기원법회(묀람첸모, Mönlam Chenmo) 였다.
티베트어로 '묀람'은 기원(祈願), '첸모'는 크다는 뜻이다.
새해 첫 달에 부처의 이적(異蹟)을 기리고, 일체 중생의 이익을 위해 기도를 올리는 이 행사는 이후 해마다 열리는 티베트 최대의 종교 행사가 됐다.
그러나 1409년이 중요한 이유는 법회 하나 때문만이 아니다.
같은 해, 쫑카파는 라싸 동쪽 60킬로미터 지점의 산비탈에 사원 하나를 세웠다.
간덴 사원(Ganden Monastery).
'간덴'은 산스크리트어 '투시타(Tuṣita)', 미래 부처 미륵이 머문다고 전해지는 하늘의 이름이다.
이 사원의 건립은 단순한 건축 사업이 아니었다.
쫑카파의 제자 집단이 독립적인 종파로 공식화되는 순간이었다.
이 종파의 이름이 겔룩파(Gelug) 다.
티베트어로 '덕의 방식'을 뜻하는 이름.
그리고 이 종파의 상징이 노란 모자다.
티베트 불교의 다른 종파들은 빨간 모자를 쓴다.
겔룩파 승려들은 노란 모자를 썼다.
이후 유럽 여행자들이 티베트를 기록할 때 '황모파(黃帽派)'라는 별명을 붙인 것도 그래서다.
쫑카파 자신은 간덴 사원의 초대 주지가 됐다.
그는 그 산비탈 사원에서 1419년 세상을 떠났다.
쫑카파가 간덴에서 죽음을 맞이한 뒤, 제자들이 움직였다.
수제자 걜찹제(Gyaltsabje) 가 간덴의 주지 자리를 이었다.
다른 제자들은 사원을 짓기 시작했다.
쫑카파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이미 두 곳이 세워졌다.
1416년에는 라싸 서쪽에 데뿡 사원(Drepung Monastery) 이 섰다.
1419년에는 라싸 북쪽에 세라 사원(Sera Monastery) 이 완성됐다.
이 세 곳 — 간덴, 데뿡, 세라 — 은 훗날 '라싸의 세 큰 사원'으로 불리게 됐다.
최전성기에 데뿡 사원 하나에만 수천 명의 승려가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겔룩파의 이야기에서 가장 세계적으로 알려진 장은, 사원 건립이 아니라 다른 데서 열린다.
쫑카파의 제자 계보에서 독특한 전통 하나가 자라났다.
뛰어난 스승이 죽으면, 그 스승이 다른 몸으로 환생한다는 믿음.
그리고 그 환생을 찾아내어 어릴 때부터 스승의 가르침을 전하는 제도.
이 전통이 제도화되면서 두 개의 큰 계보가 만들어졌다.
하나는 달라이 라마(Dalai Lama).
다른 하나는 판첸 라마(Panchen Lama).
달라이 라마라는 호칭이 공식화된 것은 16세기의 일이다.
몽골의 알탄 칸이 3대 달라이 라마에게 그 칭호를 헌정한 것이 시초다.
이후 5대 달라이 라마 때 겔룩파는 티베트의 정치권력까지 장악하게 됐다.
한 명의 승려가 쫑카에서 태어나 양 떼 사이에서 자랐다.
세 살에 계를 받고, 열여섯에 집을 떠났다.
20년을 떠돌며 배웠고, 수백 페이지의 글을 썼으며, 1409년 봄에 등불을 켰다.
그 불빛은 꺼지지 않았다.
14대 달라이 라마 텐진 갸초 는 21세기에도 쫑카파의 가르침을 이어 세계를 다닌다.
그가 쓰는 노란 모자의 계보는 그 암도 고원의 아이에게서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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