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 좀 가리지 마라디오게네스
햇빛 좀 가리지 마라디오게네스
냉장고 문에 붙은 메모를 상상해보세요.
"우유 사와."
이 메모를 믿을지 말지는 한 가지에 달려 있습니다.
누가 썼느냐.
아내가 썼으면 사 옵니다.
낯선 사람이 썼으면 무시합니다.
그런데 만약 아무도 쓴 적 없는 메모가 냉장고에 붙어 있다면?
7세기 인도에서 벌어진 가장 뜨거운 논쟁은 정확히 이 질문이었습니다.
"베다는 누가 썼는가?"
힌두 전통에서 베다는 그냥 경전이 아닙니다.
제사를 어떻게 지낼지, 신에게 무엇을 바칠지,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규정하는 절대적 권위였습니다.
그런데 불교 철학자들이 칼 같은 질문을 들이밀었습니다.
"그걸 누가 썼는지 증명할 수 있어요?"
증명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불교 논리학자들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저자를 알 수 없는 글은 신뢰할 수 없습니다.
베다는 그냥 인간이 만든 규칙집일 뿐입니다."
이 논리가 퍼지면 제사 전통 전체가 무너집니다.
브라만 계층의 권위가 사라집니다.
수천 년 된 의례가 미신이 됩니다.
이 순간, 한 남자가 등장합니다.
쿠마릴라 바타.
그는 이 싸움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적의 무기를 빼앗아 적을 쳤습니다.
"엄마"라는 단어를 누가 발명했을까요?
인류 역사 어딘가에 앉아서 "이제부터 어머니는 '엄마'라고 부르기로 하겠습니다"라고 선언한 사람이 있었을까요?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엄마"라는 소리를 들으면 자동으로, 설명 없이, 따뜻하고 구체적인 존재를 떠올립니다.
쿠마릴라는 여기서 시작합니다.
당시 불교 언어철학은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말과 의미의 연결은 그냥 사회적 약속이야.
'소'라는 소리가 소를 가리키기로 사람들이 합의한 것뿐이야."
들으면 합리적입니다.
언어가 나라마다 다르다는 것도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쿠마릴라는 반박합니다.
"약속이라면, 그 약속이 이루어지던 최초의 순간에는 무슨 언어를 썼는가?"
최초의 약속을 맺을 때도 이미 언어가 필요합니다.
"이 소리는 저 동물을 가리키기로 하자"는 문장 자체가 이미 언어입니다.
언어 없이는 언어를 만들자는 약속도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언어는 약속으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쿠마릴라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말(소리)과 의미(지시 대상) 사이의 연결은 영원하고 본유적입니다.
산스크리트어로 이 이론은 '아비히타-안바야-바다'라고 불립니다.
소리 자체 속에 의미가 내재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하냐고요?
베다는 산스크리트어로 쓰여 있습니다.
그 산스크리트어 소리들이 의미와 영원히 연결되어 있다면, 베다가 전달하는 지식도 영원합니다.
어떤 인간도 그 연결을 만든 것이 아니니, 어떤 인간도 그것을 오염시킬 수 없습니다.
불교의 공격을 언어철학으로 막아낸 것입니다.
자연법칙에는 저자가 있을까요?
중력은 누가 만들었나요?
물이 100도에서 끓는다는 사실은 누가 결정했나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중력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물리 법칙에 저자가 없다는 게 그것을 덜 믿게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믿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거기엔 누군가의 의도나 실수가 끼어들 여지가 없으니까요.
쿠마릴라는 이 논리를 베다에 적용합니다.
불교 철학자들의 공격은 이랬습니다.
"베다의 저자를 모른다면 베다를 믿을 수 없다."
쿠마릴라는 이것을 뒤집습니다.
"저자가 없기 때문에 베다를 더 믿을 수 있다."
이것이 그의 가장 파격적인 무기, 아파우루셰야(apaurusheya) 이론입니다.
'인격적 기원이 없음'이라는 뜻입니다.
논리를 따라가 봅시다.
사람이 쓴 글에는 반드시 오류가 섞입니다.
사람은 시대적 편견이 있고, 이해관계가 있고, 기억이 흐릿합니다.
아무리 위대한 철학자라도 틀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어떤 지식이 처음부터 아무도 만든 사람이 없다면?
오류를 집어넣을 사람 자체가 없습니다.
거짓말을 섞을 의도를 가진 저자가 없습니다.
베다가 "신이 썼다"고 주장하면, 불교는 즉시 반격합니다.
"그 신의 존재를 증명해라."
"신도 오류를 범할 수 있지 않느냐."
하지만 "아무도 쓰지 않았다"고 하면?
그 반격이 통하지 않습니다.
오류를 집어넣은 존재가 없으니, 오류가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역설처럼 보이지만, 쿠마릴라에게는 논리적 귀결이었습니다.
물론 반론도 있습니다.
"저자 없는 글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느냐?"
쿠마릴라의 대답은 간단합니다.
베다는 시작이 없습니다.
시간의 처음부터 있었습니다.
우주가 생성되고 소멸하는 주기마다 베다는 다시 드러납니다.
발견되는 것이지, 창조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법칙처럼.
누군가를 이기려면 먼저 그를 이해해야 합니다.
쿠마릴라는 이것을 문자 그대로 실천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불교 논리학을 정밀하게 해체하기 위해 불교 사원에 직접 들어갔습니다.
신분을 숨기고, 불교 승려들 틈에 섞여 그들의 언어로, 그들의 방법론으로 공부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었습니다.
불교 철학, 특히 디그나가와 다르마키르티가 세운 논리학과 인식론 체계는 당시 인도에서 가장 정교한 지적 구조물이었습니다.
"지식은 어디서 오는가?"
"우리는 외부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는가?"
"말은 실재를 가리킬 수 있는가?"
이 질문들에 대해 불교 철학자들은 수백 년에 걸쳐 치밀한 답을 쌓아왔습니다.
그것을 무너뜨리려면, 먼저 그 위에 올라가 봐야 했습니다.
그런데 발각됩니다.
스승에게 정체가 들통나자, 쿠마릴라는 지붕에서 뛰어내렸습니다.
전설은 그가 떨어지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만약 베다가 진리라면, 나는 살 것이다."
살았습니다.
하지만 한쪽 눈을 잃었습니다.
신화의 언어로 말하자면, 진리는 그를 지켰지만 배신의 대가도 치르게 했습니다.
이 경험은 그의 주저 슬로카바르티카(Ślokavārttika)에 고스란히 반영됩니다.
이 책은 불교 인식론을 내부에서 해체하는 작업입니다.
불교가 쌓은 논리의 벽돌을 하나하나 들어내어, 각각이 왜 무너지는지 보여줍니다.
특히 그는 불교의 찰나멸 이론, 즉 "모든 것은 순간순간 사라지고 다시 태어난다"는 주장을 공격합니다.
만약 모든 것이 찰나에 사라진다면, 우리가 어제 배운 것을 오늘 기억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동일한 인식 주체가 없으니 기억의 연속도 없습니다.
그런데 불교 논리학자들은 분명히 어제의 논리를 오늘 사용합니다.
자기 이론으로 자기를 반박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는 불교의 '무아(無我)' 이론을 겨냥합니다.
자아가 없다면, 제사를 지내는 주체도 없고, 업(카르마)을 쌓는 주체도 없고, 해탈을 추구하는 주체도 없습니다.
불교가 "무아를 깨달아야 한다"고 말할 때, 그 깨달음의 주체는 대체 누구냐는 것입니다.
쿠마릴라는 적의 언어를 배워, 그 언어로 적을 쳤습니다.
가장 강한 사람이 가장 엄격한 죄책감을 갖는 경우가 있습니다.
전설은 쿠마릴라의 최후를 이렇게 전합니다.
그는 불교 사원에서 불교 스승 밑에서 공부하며 스승을 속였습니다.
논리적으로는 필요한 일이었을지 몰라도, 그것은 속임수였습니다.
스승을 기만한 죄.
그 죄를 씻기 위해 그는 스스로 선택합니다.
왕겨불.
왕겨는 쌀겨입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타는 불.
그 위에 앉아 조금씩 타들어 가는 것은 자신이 저지른 죄를 천천히, 충분히 감당하겠다는 의지입니다.
그가 타들어 가고 있을 때, 샹카라가 달려옵니다.
샹카라.
인도 철학사에서 쿠마릴라와 함께 가장 중요한 이름 중 하나입니다.
불이원론(Advaita Vedanta)의 창시자.
"브라흐만이 곧 아트만이다"라는 명제로 인도 사상을 재편할 사람.
젊은 샹카라는 쿠마릴라를 만나러 급히 왔습니다.
철학적 가르침을 구하러, 혹은 그 죽음을 막으러.
하지만 쿠마릴라는 말합니다.
"당신이 할 일은 내가 시작한 것을 완성하는 것이오."
그리고 더 이상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 장면에는 두 인물이 대표하는 두 철학의 교차점이 있습니다.
쿠마릴라는 미맘사(Mīmāṃsā) 철학자였습니다.
미맘사는 제사와 행위(카르마)를 중심에 놓습니다.
경전에 규정된 대로 올바르게 행동하면 우주의 법칙이 결과를 만들어냅니다.
신이 없어도 됩니다.
행위 자체가 결과를 낳는 기계입니다.
샹카라는 달랐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행위가 아니라 지식(갸나)이었습니다.
"내가 브라흐만임을 알았을 때" 해탈이 옵니다.
아무리 많은 제사를 지내도, 근본 무지를 깨뜨리지 않으면 윤회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쿠마릴라는 베다를 지켰습니다.
하지만 그 베다를 어떻게 읽어야 하느냐는 질문에서 샹카라와 갈립니다.
쿠마릴라는 "베다는 행위를 명령한다"고 읽었습니다.
샹카라는 "베다는 실재의 본질을 드러낸다"고 읽었습니다.
인도 사상사의 가장 중요한 두 갈래가 여기서 나뉩니다.
왕겨불 위에서 타들어 가던 노인은 그 분기점 위에 앉아 있었습니다.
한쪽 눈으로.
쿠마릴라 바타를 단순히 "힌두 전통을 지킨 사람"으로 부르면 그를 반쪽만 이해한 것입니다.
그는 베다를 신비화하지 않고 논리로 지켰습니다.
적의 무기를 배워 적을 쳤습니다.
신의 권위 없이 경전의 권위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저지른 작은 거짓에 자신을 가장 엄격하게 심판했습니다.
철학은 머릿속에서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때로는 왕겨불 위에서 완성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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