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 좀 가리지 마라디오게네스
햇빛 좀 가리지 마라디오게네스
선생님이 교실 밖에 있어도, 아이들은 조용히 앉아 있습니다.
왜일까요?
"선생님이 곧 들어올 것 같아서."
맞습니다.
하지만 이상하지 않나요?
선생님이 실제로 보고 있는 게 아닌데, 우리는 이미 행동을 바꿉니다.
누군가 볼지도 모른다는 느낌 하나만으로요.
1970년대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는 이 단순한 사실 안에서 엄청난 비밀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18세기 영국의 공리주의 철학자 제레미 벤담이 설계한 감옥 도면을 들여다보다가 멈췄습니다.
그 감옥의 이름은 파놉티콘(Panopticon).
구조는 이렇습니다.
원형으로 늘어선 감방들이 가운데 탑 하나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탑 안에는 간수가 있습니다.
간수는 모든 감방을 내려다볼 수 있지만, 죄수들은 간수가 지금 자신을 보고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그런데 이 단순한 설계가 기적을 만들어냅니다.
간수가 자리를 비워도 죄수들은 여전히 규칙을 지킵니다.
보이지 않아도 감시가 작동하는 겁니다.
푸코는 이걸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잠깐, 이게 감옥 얘기만은 아닌데.'
옛날 권력은 단순했습니다.
왕이 칼을 들고 "따르지 않으면 죽인다"고 했습니다.
눈에 보이고, 냄새가 나고, 무서웠습니다.
그런데 왕이 사라졌습니다.
혁명이 일어나고, 민주주의가 왔습니다.
권력도 사라졌을까요?
푸코는 아니라고 했습니다.
오히려 더 교묘해졌다고 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학교 첫날, 선생님이 이렇게 말합니다.
"자리에 앉아요. 이름 부를게요. 출석 확인합니다."
여기에 칼은 없습니다.
협박도 없습니다.
그냥 시간표가 있고, 자리 배치가 있고, 출석부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구조 안에 들어서는 순간, 우리는 자동으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종이 울리면 앉고, 이름이 불리면 대답하고, 시험이 오면 준비합니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는데, 우리 스스로 그렇게 합니다.
푸코는 이걸 미시권력(micro-power) 이라고 불렀습니다.
왕의 칼처럼 한 곳에 모여 있는 권력이 아니라, 시간표·줄 세우기·성적표·자격증·진단서처럼 일상 구석구석에 스며든 권력입니다.
물처럼 흘러다니는 권력입니다.
잡으려 하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고, 그러면서도 우리 몸과 행동을 조용히 빚어갑니다.
병원을 생각해보세요.
의사가 "이게 정상 수치입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그 수치에 맞추려 합니다.
다이어트를 하고, 운동을 하고, 정기검진을 받습니다.
의사가 강요한 게 아닙니다.
'정상'이라는 기준 자체가 우리를 움직인 겁니다.
이것이 미시권력입니다.
칼보다 훨씬 조용하고, 그래서 훨씬 깊이 파고듭니다.
1000년 전 유럽에서는 지금 우리가 "감기"라고 부르는 증상을 다르게 불렀습니다.
"악마에 씌었다."
그리고 치료법은 기도와 성수였습니다.
웃기는 얘기처럼 들리죠?
그런데 500년 뒤 사람들이 지금 우리를 돌아보면 어떨까요?
"저 사람들은 왜 파란 빛 나는 화면을 하루 종일 들여다봤을까?"
"불안하면 왜 약을 먹었지? 그냥 공동체 안에서 서로 이야기하면 됐을 텐데."
어느 쪽이 옳을까요?
미셸 푸코는 1961년에 쓴 책 《광기의 역사》에서 이 질문을 정면으로 건드렸습니다.
17세기 유럽에서는 '미친 사람들'을 배에 태워 도시에서 도시로 떠돌게 했습니다.
'바보들의 배(Ship of Fools)'라고 불렸습니다.
이상하지만, 그들은 쫓겨난 게 아니라 일종의 경계인으로 존재했습니다.
도시 밖, 물 위, 어딘가에.
그런데 18세기가 되자 분위기가 바뀌었습니다.
이성의 시대, 계몽의 시대가 왔습니다.
사람들은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인간의 능력으로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그 순간, '이성적이지 않은 사람'은 병자가 됐습니다.
가두고, 치료하고, 고쳐야 할 대상이 됐습니다.
푸코가 묻습니다.
광기 자체가 달라진 걸까요?
아니면 광기를 바라보는 분류 방식이 달라진 걸까요?
마녀사냥을 생각해보세요.
중세 유럽에서 이웃과 다르게 행동하는 여성은 "마녀"로 분류됐습니다.
오늘날 같은 행동을 하면 "개성 있는 사람" 혹은 "특이한 사람" 정도로 불릴 겁니다.
행동은 같습니다.
이름표가 바뀐 겁니다.
그런데 그 이름표 하나가 그 사람의 운명을 완전히 바꿨습니다.
화형대로 가느냐, 그냥 집에 돌아가느냐를 결정했습니다.
이것이 푸코의 핵심 통찰입니다.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는 자연에 원래 있는 게 아닙니다.
누군가가 그 선을 그은 겁니다.
그리고 그 선을 긋는 행위 자체가 권력입니다.
아이에게 "너는 수학을 못해"라고 계속 말하면 어떻게 될까요?
처음엔 억울해합니다.
하지만 몇 번이고 반복해서 듣다 보면, 아이는 어느 순간 스스로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나는 수학을 못하는 사람인가 보다.'
그리고 수학 시험지를 받으면 미리 포기합니다.
포기했으니 틀립니다.
틀리니까 못한다는 말이 증명됩니다.
말이 세상을 만든 겁니다.
푸코는 이 현상에 이름을 붙였습니다.
담론(discourse).
담론은 단순히 "말"이 아닙니다.
어떤 시대, 어떤 사회에서 "이것이 진실이다"라고 통용되는 말의 체계입니다.
뉴스를 생각해보세요.
뉴스는 세상에서 일어난 일을 보도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매일 수백만 가지 일이 일어납니다.
그 중에서 무엇을 고르고, 어떤 단어로 표현하느냐에 따라 우리가 "세상은 이렇다"고 느끼는 방식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같은 시위를 두고 한 뉴스는 "민주주의 투쟁"이라고 쓰고, 다른 뉴스는 "사회 혼란"이라고 씁니다.
이름표가 다릅니다.
그러면 독자가 느끼는 현실도 달라집니다.
교과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역사 교과서에서 누구를 영웅으로 쓰고, 누구를 악당으로 쓰느냐에 따라 학생들이 자기 나라와 세계를 바라보는 틀이 달라집니다.
그 틀은 어른이 된 후에도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오늘날엔 SNS 알고리즘이 이 역할을 합니다.
당신이 오늘 클릭한 것들을 알고리즘이 기억합니다.
내일은 비슷한 것들을 더 많이 보여줍니다.
모레는 더 극단적인 버전을 보여줍니다.
어느 날 문득 깨닫습니다.
'왜 세상이 이렇게 양극화돼 있지?'
세상이 양극화된 게 아닐 수 있습니다.
당신이 보는 세상이 양극화된 겁니다.
담론이 현실을 구성한 겁니다.
푸코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이겁니다.
우리가 "당연히 그렇지"라고 생각하는 것들, 그것이 정말 당연한 건지 한 번쯤 의심해보라는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납니다.
스마트워치가 진동합니다.
"오늘 걸음 수 목표의 30%를 달성했습니다. 조금 더 움직여보세요."
화면을 열면 알고리즘이 어제 본 것과 비슷한 영상을 추천합니다.
집을 나서면 편의점 앞 CCTV가 돌아갑니다.
지하철역에도, 버스 안에도, 회사 로비에도 카메라가 있습니다.
한국에 설치된 CCTV는 1,100만 대가 넘습니다.
국민 다섯 명 당 카메라 하나꼴입니다.
푸코가 파놉티콘을 봤을 때 느꼈을 그 "설마"가, 지금 우리의 일상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이겁니다.
우리는 CCTV를 보며 불쾌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범죄 예방에 도움이 된다"며 반깁니다.
스마트워치 알림에 짜증내는 게 아니라, 그 목표를 채우려 더 열심히 걷습니다.
파놉티콘이 업그레이드됐습니다.
이제 간수가 없어도 됩니다.
우리가 스스로 자신을 감시합니다.
디지털 파놉티콘입니다.
넷플릭스는 당신이 어떤 장면에서 일시정지를 눌렀는지 기록합니다.
구글은 당신이 무엇을 검색하는지 기억합니다.
쇼핑 앱은 당신이 어떤 상품 페이지에서 몇 초를 머물렀는지 압니다.
이 데이터들이 모여 당신의 '프로필'을 만듭니다.
그 프로필에 맞는 광고가 나오고, 콘텐츠가 나오고, 가격이 책정됩니다.
벤담의 감옥에서는 죄수가 자기가 감시받고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현대의 파놉티콘에서는 그마저도 흐릿합니다.
우리는 편리함이라는 이름으로 기꺼이 감시를 받아들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푸코는 저항의 방법을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그게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의 불만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권력을 의식하는 것 자체가 이미 변화의 시작이라고.
파놉티콘이 작동하는 건 죄수들이 그 구조를 의식하지 못하거나, 의식해도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왜 나는 지금 이렇게 행동하고 있지?"라고 묻는 순간, 무언가가 달라집니다.
학교 종이 울릴 때, 우리가 자동으로 앉는 건 나쁜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행동이 어디서 왔는지 알고 앉는 것과, 그냥 반사적으로 앉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스마트워치가 "더 걸어라"고 할 때, 내가 정말 걷고 싶어서 걷는 건지, 아니면 숫자를 채우기 위해 걷는 건지 한 번쯤 물어볼 수 있습니다.
SNS에서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 "내가 화가 난 건지, 아니면 알고리즘이 내게 화를 팔고 있는 건지" 잠깐 멈춰볼 수 있습니다.
푸코는 우리에게 다른 세상을 설계해주지 않았습니다.
대신 지금 이 세상을 다른 눈으로 보는 법을 주었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할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 시작하면, 우리는 이미 그 안에서 조금 더 자유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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