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 좀 가리지 마라디오게네스
햇빛 좀 가리지 마라디오게네스
카카오톡 답장도 잘 안 하는 친구가 한 명쯤 있을 것이다.
그런데 17세기 유럽에, 평생 6만 통의 편지를 쓴 남자가 있었다.
죽을 때까지 편지를 썼고, 죽고 나서도 읽히지 않은 편지가 산더미처럼 남았다.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
이름부터 외우기 어렵다.
하지만 오늘 스마트폰을 한 번이라도 켰다면, 당신은 이미 그가 만든 것을 사용한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직업이 하나가 아니었다.
변호사였고, 외교관이었고, 광산 기술자였고, 역사가였고, 신학자였고, 수학자였다.
현대식으로 표현하자면, 링크드인 프로필에 직함이 여섯 개인 사람이다.
하노버 공작의 고문으로 일하면서 동시에 유럽 전역의 학자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스피노자에게도, 뉴턴에게도, 심지어 중국 황제에게도 편지를 썼다.
이 사람이 왜 이렇게 바빴냐고?
그에겐 꿈이 있었다.
세상의 모든 지식을 하나의 언어로 통합하는 것.
신학과 수학과 철학이 하나의 체계 안에서 맞물려 돌아가는 우주적 지식 체계를 만드는 것.
말하자면, 17세기판 인터넷을 혼자 설계하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연히, 컴퓨터의 언어를 발명했다.
먼저 한 가지 스포일러를 드리겠다.
이 싸움에서는 아무도 이기지 못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상처를 입었다.
때는 1670년대.
영국에서는 아이작 뉴턴이 조용히 혼자 미적분을 개발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발표를 안 했다.
서랍에 넣어두었다.
이유는 지금도 불분명하다.
비판이 두려웠다는 설도 있고, 그냥 귀찮았다는 설도 있다.
같은 시기, 라이프니츠도 독립적으로 미적분을 개발했다.
그리고 그는 발표를 했다.
1684년, 논문으로 세상에 내놨다.
문제는 뉴턴이 나중에 "내가 먼저 만들었는데 저 사람이 훔쳤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뉴턴은 왕립학회 회장이었다.
왕립학회는 조사위원회를 꾸렸다.
조사위원회의 결론은 "뉴턴이 먼저"였다.
그런데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 있다.
그 보고서를 사실상 뉴턴 본인이 썼다.
역사상 가장 편향된 재판 중 하나였다.
진실은 이렇다.
뉴턴이 먼저 아이디어를 가졌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라이프니츠는 독립적으로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그리고 세상에 먼저 알린 건 라이프니츠였다.
더 중요한 건 이것이다.
지금 전 세계 미적분 교과서에서 쓰는 기호들, ∫(적분), dy/dx(미분) — 이것들은 모두 라이프니츠의 표기법이다.
뉴턴의 표기법은 영국에서만 쓰다가 결국 사라졌다.
싸움에서는 졌지만, 언어를 남긴 쪽은 라이프니츠였다.
동전 한 개를 상상해보자.
앞면은 1, 뒷면은 0.
이 동전 하나로 표현할 수 있는 숫자는 두 가지뿐이다.
0 아니면 1.
그런데 동전을 두 개 놓으면?
00, 01, 10, 11 — 네 가지.
세 개면? 여덟 가지.
열 개면? 1,024가지.
이것이 이진법의 핵심이다.
0과 1만으로 세상의 모든 수를 표현할 수 있다.
우리가 쓰는 보통 숫자 체계는 0부터 9까지, 열 개의 숫자를 쓴다.
손가락이 열 개라서 그렇게 됐다는 게 유력한 설이다.
그런데 라이프니츠는 생각했다.
손가락 개수는 임의적인 것 아닌가?
숫자를 표현하는 데 꼭 열 개의 기호가 필요한 건 아니지 않나?
두 개면 충분하다.
0과 1.
있음과 없음.
켜짐과 꺼짐.
라이프니츠가 이진법에 관심을 가진 데는 철학적 이유도 있었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고, 0은 무(無), 1은 신(神)을 상징한다고 생각했다.
신이 무로부터 세상을 창조했듯, 0과 1만으로 모든 수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 그에게는 신학적 아름다움이었다.
그런데 이 신학적 유희가 250년 후 전혀 다른 곳에서 되살아난다.
1936년, 앨런 튜링이 이론적 컴퓨터를 설계했다.
1940년대, 실제 컴퓨터가 만들어졌다.
그 컴퓨터들은 전기 신호로 작동했다.
전기가 흐르면 1, 안 흐르면 0.
라이프니츠의 0과 1이 완벽하게 맞아떨어졌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화면의 모든 픽셀, 이 글의 모든 글자, 재생되는 모든 음악 — 전부 0과 1의 조합이다.
라이프니츠가 신을 수학으로 표현하려다 만든 언어가, 결국 디지털 세계의 언어가 된 것이다.
그는 기계식 계산기도 직접 만들었다.
덧셈만 되는 파스칼의 계산기를 보고, 곱셈과 나눗셈까지 되는 것을 만들었다.
"고귀한 사람들이 노예처럼 계산 작업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남기면서.
계산은 기계가 해야 한다고.
인간은 생각해야 한다고.
이 생각 자체가 이미 컴퓨터를 예언하고 있었다.
라이프니츠는 낙관주의자였다.
아주 독특한 방식의 낙관주의자.
레고 블록을 상상해보자.
신이 세상을 만들기 전에, 가능한 모든 세계의 설계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치자.
어떤 세계는 아름답지만 자유가 없고, 어떤 세계는 자유롭지만 고통이 많고, 어떤 세계는 행복하지만 지루하다.
신은 그 수많은 가능성 중에서 딱 하나를 골랐다.
라이프니츠의 주장: 신은 최선의 세계를 선택했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논리적으로 가능한 세계들 중 최선이다.
이것이 그의 철학적 핵심이다.
악이 왜 존재하냐고?
악 없이는 더 큰 선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고통이 왜 있냐고?
고통 없이는 자유도 성장도 없기 때문이다.
매우 그럴듯하게 들린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1755년 11월,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대지진이 일어났다.
성인의 날 아침, 교회에 모인 수만 명이 한꺼번에 죽었다.
사망자가 3만에서 6만 명.
유럽 전체가 충격에 빠졌다.
볼테르가 분노했다.
그리고 소설을 썼다.
《캉디드》.
주인공 캉디드는 라이프니츠 철학을 신봉하는 팡글로스 박사에게 배운다.
"우리는 최선의 세계에 살고 있다."
그런데 캉디드는 평생 동안 전쟁, 강간, 노예제, 지진, 처형을 겪는다.
팡글로스 박사는 매 장면마다 말한다.
"그래도 이것이 최선의 세계다."
볼테르의 풍자는 날카로웠다.
현실의 고통 앞에서 "이게 최선이야"라고 말하는 철학은,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침묵시킨다는 것.
그런데 흥미로운 건, 라이프니츠를 공격한 볼테르 자신도 이 세계가 개선될 수 있다고 믿었다는 점이다.
어쩌면 두 사람 모두 낙관주의자였는지 모른다.
다만 라이프니츠는 신에게 맡겼고, 볼테르는 인간에게 돌렸다.
1716년 11월 14일.
라이프니츠가 하노버에서 숨을 거뒀다.
70세였다.
장례식에는 비서 한 명만 왔다.
하노버 왕실은 조의를 표하지 않았다.
왕립학회도 추모 성명을 내지 않았다.
유럽을 가득 채웠던 편지들의 수신자들은 아무도 오지 않았다.
왜였을까?
말년의 라이프니츠는 여러 면에서 시대에 뒤처진 사람이 되어 있었다.
뉴턴과의 표절 논쟁에서 공개적으로 패했고, 그가 일생을 바쳐 섬긴 하노버 왕가는 영국 왕위를 계승하면서 관심사가 달라졌다.
그의 방대한 철학 체계는 너무 야심 차서 아무도 전체를 이해하지 못했다.
6만 통의 편지를 쓴 사람이, 아무도 편지를 보내지 않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이렇게 잔인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묘한 일이 일어났다.
19세기, 수학자들이 라이프니츠의 이진법 논문을 다시 꺼내 읽기 시작했다.
20세기, 컴퓨터 공학자들이 그의 계산기 설계를 연구했다.
수학과 학생들은 지금도 라이프니츠가 만든 기호로 적분을 배운다.
인공지능 연구자들은 라이프니츠의 꿈 — 모든 지식을 하나의 논리 체계로 — 을 다시 추구하고 있다.
당신이 오늘 유튜브 영상을 봤다면, 그 영상은 0과 1로 저장되었다.
카카오페이로 결제했다면, 그 거래는 이진수로 처리되었다.
AI 챗봇과 대화했다면, 그 모델은 라이프니츠가 꿈꾼 '보편 언어'의 후손이다.
그는 장례식에 아무도 없었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수십억 명이 그의 아이디어 위에서 살고 있다.
라이프니츠가 남긴 가장 큰 유산은 어쩌면 이것일지도 모른다.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 즉 복잡한 것을 가장 단순한 요소로 쪼개는 것.
모든 수를 0과 1로.
모든 논리를 참과 거짓으로.
모든 세계를 있음과 없음으로.
그 단순함 위에서, 우리는 지금 이 거대하고 복잡한 디지털 세계를 짓고 있다.
편지를 6만 통 쓴 남자.
뉴턴에게 지고, 왕실에게 잊혀지고, 비서 한 명만 지켜본 채 눈을 감은 남자.
하지만 그가 동전 두 개로 만든 언어는, 지금 이 세계의 언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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