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 좀 가리지 마라디오게네스
햇빛 좀 가리지 마라디오게네스
요즘 우리는 80세를 넘기면 "오래 사셨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약 300년 전, 사람들이 평균 40세쯤 세상을 떠나던 시절에 84세까지 산 사람이 있었다면 어떨까요.
그것도 병원도, 항생제도, 냉장고도 없던 시대에.
1630년, 일본 에도 시대.
도쿠가와 막부가 천하를 통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 시기에 한 아이가 후쿠오카에서 태어납니다.
이름은 가이바라 에키켄(貝原益軒).
그는 훗날 사무라이 집안 출신의 유학자이자 본초학자가 되어, 일본 역사상 가장 유명한 건강서를 쓰게 됩니다.
에키켄이 살던 에도 시대는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온 시기였지만, 의료 수준은 처참했습니다.
감기가 폐렴이 되고, 폐렴이 곧 죽음이 되던 시절.
영양 상태도 좋지 않아 영아 사망률이 높았고, 50세만 넘겨도 마을의 어른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런 세상에서 에키켄은 84세까지 살았습니다.
게다가 말년까지 집필을 멈추지 않았고, 걸음걸이도 흐트러지지 않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단순한 유전적 행운이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장수 비결을 한 권의 책에 고스란히 담아 두었습니다.
에키켄의 아버지는 후쿠오카 번(藩)을 섬기는 하급 무사였습니다.
사무라이 가문의 아들이라면 당연히 검술과 병법을 먼저 배워야 했습니다.
하지만 어린 에키켄의 눈은 칼이 아니라 풀잎에 꽂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의 서재에서 중국에서 건너온 약초 서적 한 권을 발견합니다.
그림과 함께 풀의 이름, 맛, 효능이 빼곡히 적힌 그 책은 소년의 세계를 완전히 바꿔 놓았습니다.
"이 풀은 열을 내리고, 저 뿌리는 배앓이를 멎게 한다고?"
소년은 책에 나온 풀을 직접 찾아 산과 들을 헤맸습니다.
에키켄은 자라면서 당시 일본 지식인의 필수 교양이던 주자학(朱子學)을 정식으로 공부합니다.
주자학은 중국 송나라의 주희가 정립한 유교 철학으로, 우주의 이치를 사색과 독서로 깨닫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습니다.
쉽게 말하면, 책상 앞에 앉아 "세상의 원리란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는 학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에키켄은 이상한 학생이었습니다.
강의실에 앉아 있을 때보다 밖에 나가 흙을 만지고 풀 냄새를 맡을 때 더 많은 것을 이해한다고 느꼈으니까요.
"책에 적힌 약초가 진짜 효과가 있는지, 직접 먹어보면 되지 않나?"
이 단순한 질문이 훗날 그를 일본 본초학(本草學)의 아버지로 만들게 됩니다.
본초학은 오늘날의 약리학이나 식물학에 해당하는 학문입니다.
어떤 식물이 몸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관찰하고 기록하는 일.
에키켄은 평생 동안 일본 전역을 여행하며 1,400종이 넘는 식물을 직접 채집하고 분류했습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일본 최초의 체계적 식물 도감 『대화본초(大和本草)』입니다.
에키켄의 수많은 저서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책은 단연 『양생훈』(養生訓)입니다.
그가 83세 되던 해에 완성한 이 책은, 말하자면 "300년 전에 쓰인 건강 바이블"이었습니다.
'양생'이라는 말 자체가 흥미롭습니다.
양(養)은 기르다, 생(生)은 생명.
즉, 생명을 가꾸는 기술이라는 뜻입니다.
치료가 아니라 예방, 약이 아니라 습관에 초점을 맞춘 거죠.
양생훈의 핵심 메시지는 놀라울 정도로 단순합니다.
요약하면 딱 세 줄입니다.
적게 먹어라.
적게 화내라.
몸을 움직여라.
"에이, 그게 다야?" 싶으시죠.
그런데 이 세 줄이 바로 현대 의학이 수천 건의 논문을 통해 도달한 결론과 거의 정확히 일치합니다.
먼저, "적게 먹어라"에 대해 이야기해 봅시다.
에키켄은 "배가 부르기 전에 숟가락을 놓아라"라고 썼습니다.
구체적으로 팔 할(八分), 즉 위장의 80%만 채우라는 뜻입니다.
현대 영양학에서는 이를 '칼로리 제한'(caloric restriction)이라 부르며, 노화를 늦추고 수명을 연장하는 가장 강력한 식이 전략 중 하나로 봅니다.
일본 오키나와의 장수 노인들이 실천하는 "하라 하치부"(腹八分) — 배의 팔 할만 채운다 — 가 바로 이 원칙의 살아있는 증거입니다.
다음으로, "적게 화내라".
에키켄은 분노와 근심이 몸의 기(氣)를 소모한다고 경고했습니다.
오늘날의 언어로 바꾸면, 만성 스트레스가 코르티솔 수치를 높이고 면역 체계를 망가뜨린다는 이야기입니다.
2017년 하버드 공중보건대학원의 연구에 따르면, 만성적 분노는 심혈관 질환 위험을 최대 두 배까지 높입니다.
에키켄은 코르티솔이라는 단어를 몰랐지만, 그 효과는 정확히 관찰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마지막으로, "몸을 움직여라".
에키켄은 특별한 운동법을 권한 게 아닙니다.
그저 매일 아침 천천히 걸으라고 했습니다.
"몸이 노곤할 때 쉬는 것보다 가볍게 움직이는 것이 낫다"고도 썼습니다.
현대 의학이 '활동적 회복'(active recovery)이라 부르는 개념과 놀랍도록 닮아 있습니다.
세계보건기구(WHO)가 권장하는 "하루 30분 걷기"와도 맥이 통합니다.
300년 전 한 노학자의 관찰이 현대 의학의 결론과 이토록 겹친다는 사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 오랫동안 자기 몸을 실험실 삼아 관찰한 사람만이 도달할 수 있는 통찰이었습니다.
에키켄의 업적은 건강서에 그치지 않습니다.
사실 그를 진정으로 특별하게 만든 것은 지적 용기였습니다.
당시 일본 학계는 주자학이 절대적 권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자학에서는 세상의 이치를 "이(理)"라는 추상적 원리로 설명했습니다.
"꽃이 왜 피는가?"라는 질문에 "천리(天理)가 그러하기 때문이다"라고 답하는 식이었습니다.
만져보고, 잘라보고, 비교해 볼 필요 없이 이미 경전에 답이 있다는 태도였죠.
에키켄은 이것이 답답했습니다.
"경전에 적힌 약초의 효능이 정말 맞는지, 왜 아무도 직접 확인하지 않는가?"
그는 70대에 이르러 자신이 평생 공부한 주자학에 정면으로 의문을 제기하는 책을 씁니다.
바로 『대의록』(大疑錄)입니다.
'대의'란 "크게 의심한다"는 뜻입니다.
70년 넘게 주자학을 공부한 대학자가 "나는 주자의 말에 큰 의심이 있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로 치면, 평생 한 분야를 연구한 원로 교수가 "우리 학계의 전제가 틀렸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당연히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에키켄의 주장은 간명했습니다.
"직접 보고, 만지고, 시험해야 안다."
경전의 권위가 아니라 관찰과 경험이 진짜 앎의 기초라는 것.
이것은 동시대 유럽에서 프랜시스 베이컨이 주장한 경험주의, 갈릴레오가 실천한 실험 정신과 놀랍도록 닮아 있습니다.
물론 당대의 주류 학자들은 반발했습니다.
"감히 주자를 의심하다니, 학문의 근본을 흔드는 것이다."
하지만 에키켄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8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직접 확인하라"는 원칙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의 실증주의 정신은 훗날 일본의 난학(蘭學, 네덜란드를 통해 들어온 서양 과학)을 받아들이는 토양이 됩니다.
서양 의학과 과학을 단순히 이국의 기술이 아니라, 자신들이 이미 추구하던 "직접 관찰의 정신"의 연장선으로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죠.
에키켄이 뿌린 씨앗이 100년 뒤 일본 근대화의 한 뿌리가 된 셈입니다.
300년 전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드린 건, 그저 역사가 흥미로워서가 아닙니다.
에키켄의 양생훈에는 오늘 저녁 바로 실천할 수 있는 원칙들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팔 할만 먹기.
오늘 저녁 식사 때 한 가지만 실험해 보세요.
평소 먹던 양에서 한두 숟갈을 줄이는 겁니다.
"조금 아쉽다" 싶을 때 수저를 놓으세요.
위장은 음식이 들어온 뒤 약 20분이 지나야 "충분하다"는 신호를 뇌에 보냅니다.
그러니 식사를 마친 직후의 약간의 허전함은, 사실 20분 뒤에는 편안한 포만감으로 바뀝니다.
매일 이것만 실천해도, 에키켄이 300년 전에 약속한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잠자리 전 분노 내려놓기.
에키켄은 잠들기 전 마음을 고요하게 하라고 강조했습니다.
현대어로 번역하면, "자기 전에 SNS를 보지 마라"에 가깝습니다.
댓글 창의 논쟁, 뉴스의 분노 유발 헤드라인, 읽지 않은 업무 메일.
이런 것들이 잠자리에서 코르티솔을 올리고 수면의 질을 떨어뜨립니다.
오늘 밤, 잠들기 30분 전에 스마트폰을 침대 밖에 두어 보세요.
그리고 오늘 하루 감사한 일 하나만 떠올려 보세요.
에키켄이 말한 "마음의 기를 안정시키는 것"은 결국 이런 작은 습관에서 시작됩니다.
세 번째, 아침 산책.
에키켄은 매일 아침 해가 뜨면 집 근처를 천천히 걸었다고 합니다.
빠르게 뛸 필요 없습니다.
10분이면 충분합니다.
아침 햇빛을 받으며 걸으면 체내 세로토닌 분비가 촉진되고, 밤에 멜라토닌 생성이 원활해져 수면의 질이 좋아집니다.
에키켄이 세로토닌을 알았을 리 없지만, 그 효과는 자기 몸으로 확인한 것입니다.
300년 전, 항생제도 CT 스캔도 없던 시대에 한 노학자가 도달한 결론.
적게 먹고, 마음을 다스리고, 몸을 움직여라.
이 단순한 세 가지가 현대 의학의 최신 연구와 고개를 끄덕이며 만납니다.
에키켄은 양생훈의 서문에 이렇게 썼습니다.
"사람의 몸은 부모에게 받은 것이니,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
오늘 저녁, 수저를 조금 일찍 내려놓는 것.
그것이 300년 전 한 사무라이 학자가 우리에게 건네는 첫 번째 인사입니다.
0
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