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 좀 가리지 마라디오게네스
햇빛 좀 가리지 마라디오게네스
지금으로부터 약 250년 전, 유럽의 부모들은 아이가 태어나면 축하보다 걱정이 앞섰습니다.
"이 아이가 천연두를 이겨낼 수 있을까?"
천연두는 지금은 사라진 병이지만, 당시에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병이었습니다.
온몸에 물집이 잡히고, 고열에 시달리다가, 열 명 중 세 명은 목숨을 잃었습니다.
살아남아도 얼굴에 깊은 흉터가 남았습니다.
움푹 패인 자국이 평생 따라다녔지요.
왕이라고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도 천연두를 앓았고, 평생 두꺼운 화장으로 흉터를 가렸습니다.
프랑스의 루이 15세는 천연두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돈이 많아도, 권력이 세도, 이 병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게 무력했습니다.
18세기 유럽에서 천연두는 매년 약 4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지금의 코로나보다 훨씬 더 치명적이었다고 상상하면 됩니다.
거리를 걷다 보면 얼굴에 흉터가 있는 사람이 셋 중 하나였습니다.
그만큼 흔하고, 그만큼 잔인한 병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병을 피하기 위해 별별 방법을 다 썼습니다.
부적을 걸기도 하고, 기도를 드리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일부러 가벼운 천연두 환자의 고름을 건강한 사람에게 문지르는 방법도 있었습니다.
인두법이라 불리는 이 방법은 운이 좋으면 면역이 생겼지만, 운이 나쁘면 그대로 천연두에 걸려 죽었습니다.
도박이었습니다.
이 절망적인 시대에, 영국의 한 시골 마을에서 조용히 답을 찾아가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영국 글로스터셔 지방의 시골 마을.
이곳에서 의사로 일하던 에드워드 제너는 어릴 때부터 자연을 관찰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새의 둥지를 들여다보고, 고슴도치의 겨울잠을 기록하고, 동물과 사람의 병을 비교하며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제너는 흥미로운 소문을 듣습니다.
마을에서 소젖을 짜는 여인들이 천연두에 걸리지 않는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이상하다.
온 마을이 천연두로 난리인데, 왜 유독 그 여인들만 멀쩡할까?"
제너는 그 여인들의 손을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손에 작은 물집 자국이 있었습니다.
소의 젖을 짜다가 소에게서 옮은 병, 바로 우두의 흔적이었습니다.
우두는 소가 걸리는 병입니다.
사람에게 옮으면 손에 물집이 좀 생기고, 며칠 열이 나다가 저절로 낫습니다.
천연두와 비교하면 감기 수준이었지요.
제너의 머릿속에서 하나의 생각이 번개처럼 스쳤습니다.
"우두를 앓으면 천연두에 걸리지 않는 거라면…
일부러 우두를 옮기면 천연두를 막을 수 있지 않을까?"
지금 우리가 보면 당연해 보이는 추론입니다.
하지만 이 시대에 면역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바이러스도, 항체도, 아무도 몰랐습니다.
제너가 가진 건 오직 관찰과 직감뿐이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소젖 짜는 아가씨들은 천연두에 안 걸린다"는 건 시골의 오래된 상식이었거든요.
하지만 아무도 그 상식을 증명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제너만이 그 소문 속에서 과학의 실마리를 본 것입니다.
1796년 5월 14일.
이 날짜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날 중 하나입니다.
제너는 마을의 소젖 짜는 여인 사라 넬름스를 찾아갔습니다.
사라의 손에는 우두에 걸려 생긴 물집이 있었습니다.
제너는 그 물집에서 고름을 조금 채취했습니다.
그리고 여덟 살 소년 제임스 핍스의 팔에 작은 상처를 내고, 그 고름을 문질렀습니다.
며칠 뒤, 제임스는 가벼운 열이 나고 팔이 좀 부었습니다.
하지만 금방 나았습니다.
우두는 원래 그 정도의 가벼운 병이니까요.
여기까지는 쉬웠습니다.
진짜 문제는 그다음이었습니다.
제너는 6주 뒤, 제임스에게 진짜 천연두를 접종했습니다.
천연두 환자의 고름을 가져와서 소년의 팔에 문지른 것입니다.
상상해보세요.
만약 제너의 가설이 틀렸다면, 이 여덟 살 아이는 천연두에 걸려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제너의 손은 떨렸을 것입니다.
핍스의 어머니는 얼마나 불안했을까요.
하루가 지났습니다.
이틀이 지났습니다.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제임스 핍스는 천연두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멀쩡했습니다.
열도 나지 않았고, 물집도 잡히지 않았습니다.
우두가 천연두를 막아준 것입니다.
제너는 이후 핍스에게 스무 번 넘게 천연두를 접종했습니다.
매번 결과는 같았습니다.
이 소년은 천연두에 면역이 생긴 것이었습니다.
물론, 지금의 윤리 기준으로 보면 이 실험은 큰 문제가 있습니다.
여덟 살 아이에게 치명적인 병을 일부러 옮기다니요.
하지만 당시에는 매년 수십만 명이 죽어가고 있었고, 제너에게는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이 위험한 도박이 결국 인류를 구했습니다.
제너는 자신의 발견을 정리해서 런던의 왕립학회에 논문을 보냈습니다.
"우두를 접종하면 천연두를 예방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논문은 거절당했습니다.
"시골 의사가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소의 병을 사람에게 옮기다니, 정신이 나갔군."
런던의 유명한 의사들은 제너를 비웃었습니다.
심지어 풍자만화까지 등장했습니다.
우두를 맞은 사람의 몸에서 소뿔이 자라고, 꼬리가 나오는 그림이었습니다.
"백신을 맞으면 소가 된다!"는 공포가 퍼졌습니다.
어디서 많이 본 장면 아닌가요?
새로운 백신이 나올 때마다 돌아오는 두려움과 의심.
200년 전에도 똑같았습니다.
하지만 제너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자비를 들여 소책자를 출판했습니다.
더 많은 사람에게 우두를 접종하고, 결과를 기록했습니다.
증거가 쌓이자, 조금씩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극적인 반전은 적국에서 왔습니다.
영국과 전쟁 중이던 나폴레옹이 제너의 백신을 프랑스 군대에 도입한 것입니다.
제너가 전쟁 포로의 석방을 요청하자, 나폴레옹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제너의 요청이라면 거절할 수 없다."
적국의 황제마저 인정한 것입니다.
스페인은 백신을 전 세계 식민지에 보급하기 위해 배를 띄웠습니다.
고아 소년들의 팔에 우두를 순서대로 접종하면서 대서양을 건넜습니다.
냉장고가 없던 시대의 놀라운 해법이었지요.
제너는 점점 유명해졌지만, 끝까지 시골 마을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런던에서 돈을 벌 기회가 있었지만, 그는 고향에서 가난한 환자들을 돌보는 쪽을 택했습니다.
제너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그의 발견은 계속 퍼져나갔습니다.
과학자들은 제너의 방법을 발전시켜 더 안전하고 효과적인 백신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1980년 5월 8일, 세계보건기구(WHO)는 역사적인 선언을 합니다.
"천연두는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인류가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의 전염병을 완전히 없앤, 역사상 최초의 순간이었습니다.
수천 년 동안 인류를 괴롭히던 병이 마침내 사라진 것입니다.
재미있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백신(vaccine)"이라는 단어.
이 단어는 라틴어로 소를 뜻하는 "vacca"에서 왔습니다.
제너가 소의 병, 우두에서 해답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프랑스의 과학자 루이 파스퇴르가 제너에 대한 존경의 의미로 이 이름을 붙였습니다.
백신이라는 단어 안에 소가 숨어있었던 거예요.
제너 이후, 파스퇴르는 광견병 백신을 만들었습니다.
20세기에는 소아마비, 홍역, 파상풍 백신이 차례로 개발되었습니다.
그리고 2020년, 전 세계를 뒤흔든 코로나 팬데믹이 찾아왔을 때, 과학자들은 놀라운 속도로 백신을 만들어냈습니다.
그 모든 백신의 출발점에 제너가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제너가 한 일은 대단히 단순합니다.
시골 마을의 소문을 무시하지 않고, 귀를 기울인 것.
"왜 소젖 짜는 여인들은 천연두에 안 걸릴까?"라는 질문을 끝까지 붙잡은 것.
그리고 그 답을 증명하기 위해 위험을 감수한 것.
위대한 발견은 거창한 실험실에서만 태어나지 않습니다.
때로는 시골 마을의 헛간에서, 소젖을 짜는 여인의 손에서, 여덟 살 소년의 팔뚝에서 시작됩니다.
에드워드 제너는 단 한 방울의 고름으로 인류의 운명을 바꿨습니다.
그리고 그가 남긴 유산은 지금 이 순간에도, 전 세계 어딘가에서 누군가의 팔에 놓이는 주사 한 방 속에 살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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