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 좀 가리지 마라디오게네스
햇빛 좀 가리지 마라디오게네스
학교 운동장 둘레를 재야 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간단합니다.
줄자를 들고 걸으면 됩니다.
그런데 만약 재야 할 대상이 운동장이 아니라 지구 전체라면요?
비행기도, 인공위성도, GPS도 없던 시절이라면요?
지금으로부터 약 천 년 전, 정말로 이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해낸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름은 알비루니(Al-Biruni).
그는 산 하나에 올라가서, 눈으로 보이는 풍경과 간단한 수학만으로 지구의 둘레를 계산했습니다.
더 놀라운 건 그 답이 오늘날 우리가 아는 값과 거의 같았다는 겁니다.
오차가 고작 1~2퍼센트.
도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이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여러분은 "과학"이라는 게 거창한 실험실이 아니라 좋은 질문 하나에서 시작된다는 걸 알게 될 겁니다.
서기 973년,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땅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본명은 아부 라이한 무함마드 이븐 아흐마드.
하지만 세상은 그를 알비루니라고 불렀습니다.
'비루니'는 '바깥에서 온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름부터가 이방인이었던 셈이지요.
그가 태어난 곳은 호라즘이라는 작은 왕국이었습니다.
중앙아시아 한복판, 실크로드가 지나가는 길목.
동쪽에서 온 비단과 서쪽에서 온 향신료가 만나는 곳이었지만, 동시에 강대국들이 끊임없이 탐내는 땅이기도 했습니다.
알비루니가 스물두 살이 되던 해, 그의 나라는 전쟁으로 무너졌습니다.
새로운 왕조가 들어섰고, 알비루니는 고향을 떠나 떠돌아야 했습니다.
몇 년 뒤에는 아예 가즈나 왕조의 술탄 마흐무드에게 끌려갑니다.
학자를 전리품처럼 데려간 거지요.
보통 사람이라면 절망했을 겁니다.
하지만 알비루니는 달랐습니다.
그는 끌려간 곳이 어디든 배울 거리를 찾았습니다.
마흐무드가 인도를 침략할 때, 알비루니는 군대를 따라가면서 산스크리트어를 배웠습니다.
인도의 학자들과 대화하고, 그들의 수학과 천문학을 공부했습니다.
포로의 처지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비교문화 연구를 해낸 겁니다.
시대가 그를 만들었을까요, 그가 시대를 만들었을까요?
아마 둘 다일 겁니다.
전쟁이 그를 세상 밖으로 내몰았고, 그의 호기심이 그 세상을 기록으로 바꿨으니까요.
자, 이제 가장 재미있는 부분입니다.
알비루니는 정말로 어떻게 지구의 크기를 알아냈을까요?
먼저 아주 간단한 놀이를 하나 상상해 봅시다.
해질 무렵, 운동장에 서서 자기 그림자를 바라봅니다.
키가 크면 그림자가 길고, 키가 작으면 그림자가 짧습니다.
그림자의 길이와 자기 키를 알면, 태양이 하늘에서 몇 도 기울어져 있는지 계산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삼각법의 기본 원리입니다.
알비루니는 이 원리를 지구 크기에 적용했습니다.
그의 방법은 이랬습니다.
첫 번째,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갑니다.
알비루니가 오른 산은 지금의 파키스탄 지역에 있는 난다나 요새 근처의 산이었습니다.
두 번째, 산꼭대기에서 수평선(지평선)을 바라봅니다.
여기서 핵심이 등장합니다.
산꼭대기에서 보는 수평선은 눈높이보다 살짝 아래에 있습니다.
지구가 둥글기 때문이지요.
농구공 위에 개미 한 마리가 서 있다고 상상해 보세요.
개미가 높이 올라갈수록, 공의 표면이 아래로 휘어지는 게 더 잘 보입니다.
바로 그 원리입니다.
세 번째, 수평선이 눈높이에서 얼마나 아래로 내려가 있는지, 그 각도를 정밀하게 측정합니다.
알비루니는 아스트롤라베라는 정교한 천문 도구를 사용했습니다.
네 번째, 산의 높이를 알고, 수평선까지의 각도를 알면, 삼각형 하나가 만들어집니다.
산꼭대기가 삼각형의 한 꼭짓점이고, 지구 중심이 또 다른 꼭짓점이고, 수평선이 닿는 지점이 마지막 꼭짓점입니다.
이 삼각형의 변과 각도를 가지고 계산하면?
지구의 반지름이 나옵니다.
반지름을 알면 둘레는 저절로 구해지지요.
알비루니가 계산한 지구 반지름은 약 6,339킬로미터.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실제 값은 약 6,371킬로미터입니다.
그 차이가 고작 32킬로미터.
비율로 따지면 0.5퍼센트도 안 되는 오차입니다.
인공위성도 없이, 컴퓨터도 없이, 산 하나와 머리 하나로 해낸 일입니다.
천 년 전에요.
알비루니의 천재성은 수학에서만 빛난 게 아닙니다.
그가 쓴 책 중에 『인도의 역사』(타리크 알힌드)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이 왜 특별하냐면, 천 년 전에 쓰인 것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공정하기 때문입니다.
당시 상황을 생각해 보세요.
알비루니는 무슬림이었고, 그가 연구한 대상은 힌두교 문화였습니다.
그를 데려간 술탄 마흐무드는 인도의 사원을 부수고 약탈한 정복자였습니다.
그 상황에서 알비루니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힌두인들이 믿는 것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겠다. 내 의견은 끼워넣지 않겠다."
그리고 정말로 그렇게 했습니다.
그는 산스크리트어를 직접 배워서 원전을 읽었습니다.
힌두교의 철학, 수학, 천문학, 카스트 제도, 축제, 지리를 꼼꼼하게 기록했습니다.
어떤 것도 "틀렸다"거나 "열등하다"고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비교했을 뿐입니다.
"힌두 학자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그리스 학자들은 저렇게 생각한다. 둘 다 나름의 이유가 있다."
이런 태도는 오늘날의 인류학이나 비교문화학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자세입니다.
다른 문화를 자기 기준으로 재단하지 않고, 그 문화 안의 논리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
놀라운 건 이걸 21세기가 아니라 11세기에 해냈다는 겁니다.
현대 학자들이 알비루니를 "최초의 인류학자"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알비루니는 평생 동안 무려 146권의 책을 썼다고 전해집니다.
천문학, 수학, 지리학, 역사학, 약학, 광물학, 철학.
한 사람이 다룬 분야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넓습니다.
그는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 가능성을 진지하게 논의했습니다.
코페르니쿠스보다 500년이나 앞서서요.
그는 빛의 속도가 소리보다 빠르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인도에서 발견한 화석을 보고, 그 땅이 한때 바다였을 거라고 추측했습니다.
지질학적 사고의 싹을 천 년 전에 틔운 겁니다.
오늘날 달에는 알비루니라는 이름이 붙은 크레이터가 있습니다.
지름이 77킬로미터나 되는 거대한 분화구입니다.
소행성 하나에도 그의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하지만 알비루니가 우리에게 남긴 가장 큰 유산은 이름이 아닙니다.
그것은 태도입니다.
모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태도.
낯선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항상 열어두는 태도.
알비루니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진실에 이르는 길은 하나가 아니다. 누군가의 방법이 나와 다르다고 해서 틀린 것은 아니다."
천 년 전 산꼭대기에서 지구를 내려다본 그 사람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도구는 망원경도, 컴퓨터도 아니라 열린 마음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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