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 좀 가리지 마라디오게네스
햇빛 좀 가리지 마라디오게네스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했다고 해보자.
메뉴판에 "4.5유로"라고 적혀 있다.
당신은 지갑에서 5유로를 꺼내고, 0.5유로를 거슬러 받는다.
아무것도 어렵지 않다.
그런데 만약 소수점이라는 게 세상에 없다면 어떨까?
"4.5유로"를 쓸 수가 없다.
대신 이렇게 써야 한다.
"4유로와 2분의 1유로."
아직까진 괜찮다.
그런데 옷감 장사를 한다고 생각해 보자.
천 1미터에 7분의 3길더.
이걸 17미터 팔면?
7분의 3 곱하기 17.
분수끼리 곱하고, 약분하고, 다시 통분하고.
계산기도 없는 1500년대에, 손으로, 깃펜으로.
16세기 유럽의 상인들은 매일 이 악몽을 살았다.
세금도 분수, 이자도 분수, 환율도 분수.
장부 한 줄 쓰는 데 지금의 열 배는 걸렸을 것이다.
이 고통을 끝낸 사람이 있다.
이름은 시몬 스테빈.
벨기에 브뤼헤 출신의 수학자.
그는 1585년, 유럽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분수를 버려라. 더 쉬운 방법이 있다."
시몬 스테빈은 1548년, 지금의 벨기에 브뤼헤에서 태어났다.
놀랍게도 그의 첫 직업은 수학자가 아니었다.
항구 도시의 무역 회사에서 회계 장부를 쓰는 사무원이었다.
브뤼헤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바쁜 항구 중 하나였다.
영국에서 양모가 들어오고, 이탈리아에서 향신료가 들어오고, 독일에서 은이 들어왔다.
그 물건들의 가격을 매기고, 세금을 붙이고, 환율을 계산하는 게 스테빈의 일이었다.
매일 분수와 씨름하는 삶.
3분의 2에 7분의 5를 곱하고, 거기에 12분의 1을 더하는 계산을 하루에도 수십 번.
스테빈은 생각했을 것이다.
"이걸 더 간단하게 할 수는 없을까?"
서른이 넘은 나이에, 스테빈은 갑자기 대학에 들어간다.
네덜란드 레이던 대학교.
그곳에서 그는 수학, 천문학, 공학을 닥치는 대로 공부했다.
늦깎이 학생이었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현장에서 얻은 문제의식이 가득했다.
학자들이 책상에서 고민하는 추상적 질문이 아니었다.
"계산을 어떻게 하면 더 빠르고 틀리지 않게 할 수 있을까?"
현실의 고통에서 출발한 질문.
이것이 스테빈을 다른 수학자들과 구별짓는 핵심이었다.
1585년, 스테빈은 아주 얇은 책 한 권을 세상에 내놓는다.
제목은 《De Thiende》.
네덜란드어로 "십분의 일"이라는 뜻이다.
고작 30쪽짜리 소책자.
하지만 이 작은 책이 유럽의 계산법을 완전히 뒤바꿔 놓는다.
스테빈의 아이디어는 놀라울 정도로 단순했다.
피자를 떠올려 보자.
피자 한 판을 10조각으로 자르면, 한 조각은 전체의 "10분의 1"이다.
그 한 조각을 다시 10개로 자르면, 그건 "100분의 1"이다.
또 자르면 "1000분의 1".
스테빈은 말했다.
"모든 분수를 10, 100, 1000으로 바꿔서 쓰면 되지 않나?"
3분의 1?
대략 10분의 3, 더 정확히는 1000분의 333.
이렇게 쓰면 분수의 곱셈이 그냥 정수의 곱셈이 된다.
통분도 필요 없고, 약분도 필요 없다.
자릿수만 맞추면 끝.
물론 스테빈의 원래 표기법은 지금 우리가 쓰는 것과 좀 달랐다.
그는 4.5를 "4⓪5①"처럼 동그라미 안에 숫자를 넣어 자릿수를 표시했다.
솔직히 좀 불편한 표기법이었다.
하지만 핵심 아이디어 — 모든 것을 10의 거듭제곱으로 나타내자는 생각 — 는 완벽했다.
이 아이디어가 퍼져나가면서 표기법은 점점 다듬어졌다.
나중에 스코틀랜드의 수학자 존 네이피어가 점(.) 하나로 정수와 소수를 구분하는 방법을 제안했다.
그렇게 태어난 것이 바로 우리가 매일 쓰는 소수점이다.
스테빈이 이 책을 누구에게 바쳤는지 보면 그의 의도가 분명해진다.
"천문학자, 측량사, 양탄자 제조업자, 포도주 통 측정사, 조폐국 관리, 그리고 모든 상인에게."
학자가 아니라 일하는 사람들을 위한 책이었다.
스테빈에게는 소수점 말고도 놀라운 업적이 있다.
학교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갈릴레오가 피사의 사탑에서 무거운 공과 가벼운 공을 동시에 떨어뜨렸더니, 두 공이 동시에 바닥에 닿았다."
이 유명한 실험.
사실 스테빈이 먼저 했다.
그것도 갈릴레오보다 2년이나 앞서서.
1586년, 스테빈은 친구이자 수학자인 얀 코르넬리스존 더 흐로트와 함께 네덜란드 델프트의 교회 탑에 올라갔다.
그들은 무게가 10배 차이 나는 납 공 두 개를 준비했다.
당시 사람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무거운 물체가 가벼운 물체보다 빨리 떨어진다."
2천 년 동안 아무도 의심하지 않은 상식이었다.
스테빈은 두 공을 동시에 놓았다.
결과?
두 공이 거의 동시에 바닥을 쳤다.
탑 아래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은 하나가 아니라 하나의 소리만 들었다.
"쿵" 하는 소리가 딱 한 번.
스테빈은 이 결과를 기록으로 남겼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틀렸다."
짧고 명확한 결론이었다.
갈릴레오의 피사의 사탑 실험은 사실 실제로 했는지조차 확실하지 않다.
제자가 전기에 쓴 이야기일 뿐, 갈릴레오 본인의 기록은 없다.
반면 스테빈의 실험은 본인이 직접 기록을 남긴, 확인된 사실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갈릴레오만 기억할까?
이유는 단순하다.
갈릴레오는 이탈리아 사람이고, 스테빈은 작은 나라 네덜란드 사람이었다.
역사는 종종 이렇게 불공평하다.
스테빈에게는 한 가지 더 놀라운 주장이 있었다.
당시 유럽의 학문 세계에서는 라틴어가 절대적이었다.
논문도 라틴어, 강의도 라틴어, 편지도 라틴어.
라틴어를 모르면 학자가 될 수 없었다.
스테빈은 이것에 반기를 들었다.
"네덜란드어로 과학을 하자."
그의 논리는 이랬다.
라틴어는 번역된 언어다.
그리스어에서 옮겨온 것이고, 그 과정에서 뜻이 왜곡된 것도 많다.
차라리 우리가 매일 쓰는 말로 정확하게 표현하는 게 낫지 않은가?
스테빈은 실제로 자신의 거의 모든 책을 네덜란드어로 썼다.
그리고 과학 용어도 라틴어 대신 네덜란드어로 새로 만들었다.
오늘날 네덜란드어에서 쓰이는 수학·과학 용어 상당수가 스테빈이 만든 것이다.
"wiskunde"(수학), "meetkunde"(기하학) 같은 단어들이 모두 그의 작품이다.
이것이 왜 중요할까?
한번 상상해 보자.
만약 지금도 과학을 라틴어로만 배워야 한다면?
물리 시간에 선생님이 라틴어로 설명하고, 시험도 라틴어로 본다면?
과학은 극소수 엘리트만의 것으로 남았을 것이다.
스테빈은 이 벽을 깬 선구자 중 한 명이었다.
"지식은 모든 사람의 것이어야 한다."
이 믿음을 몸소 실천한 사람.
나중에 스테빈은 네덜란드 독립 전쟁의 영웅 마우리츠 왕자의 군사 고문이 된다.
성곽 설계, 수문 공학, 군사 전략.
수학으로 전쟁터를 바꾸는 일을 했다.
측량과 토목에서도 그의 소수 체계는 빛을 발했다.
스테빈은 1620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남긴 것은 화려한 전설이 아니다.
오늘 당신이 계산기를 두드릴 때 쓰는 소수점.
과학 시간에 한국어로 물리 법칙을 배울 수 있다는 사실.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이 동시에 떨어진다는 상식.
모두 이 조용한 네덜란드 수학자에게서 시작된 것이다.
다음에 카페에서 "4.5유로"라는 숫자를 볼 때, 잠깐 떠올려 주길.
400년 전, 회계 장부 앞에서 분수에 짜증을 내다가 세상을 바꾼 사람.
시몬 스테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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