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 좀 가리지 마라디오게네스
햇빛 좀 가리지 마라디오게네스
여러분 반에 이런 친구가 있다고 상상해 보세요.
아빠는 의사인데, 학교에서는 그 애만 시험을 볼 수 없습니다.
이유요?
엄마가 '자격이 안 되는 사람'이라서요.
말도 안 되죠?
그런데 200년 전 조선에서는 이게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1824년, 경주의 한 양반 집에서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이름은 최제우.
아버지 최옥은 꽤 이름 있는 유학자였어요.
문제는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는 남편을 잃고 다시 시집온 여자, 즉 재가녀였어요.
조선에서 재가녀의 아들은 양반의 피가 흘러도 양반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과거시험?
꿈도 못 꿉니다.
벼슬?
절대 불가능합니다.
아버지의 서재에는 책이 가득했지만, 최제우에게 그 지식은 어디에도 쓸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운전면허 없이 차 열쇠만 가진 셈이에요.
열 살에 어머니를 잃고, 열여섯에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혼자 남은 최제우는 집을 나섰어요.
장사도 해 보고, 점도 쳐 보고, 전국 방방곡곡을 10년 넘게 떠돌았습니다.
그는 계속 하나의 질문을 품고 있었습니다.
"왜 태어난 것만으로 사람의 값어치가 정해지는 걸까?"
이 질문이 결국 조선 전체를 뒤흔드는 답으로 돌아올 줄은, 그때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최제우가 떠돌던 1850년대의 조선은, 한마디로 엉망진창이었습니다.
비유하자면 이런 상황이에요.
학교에서 급식비를 걷는데, 선생님이 이미 낸 학생에게 또 내라고 합니다.
항의하면 벌을 받고요.
그런데 옆 반에서는 한 번도 안 낸 애가 있는데 아무도 뭐라 안 합니다.
조선의 세금 제도가 딱 이 꼴이었어요.
삼정의 문란이라고 부르는 현상인데, 쉽게 말하면 세금을 걷는 사람들이 백성의 돈을 마구 뜯어낸 겁니다.
죽은 사람에게 세금을 매기고, 갓난아기에게 군역을 부과했어요.
농민들은 먹고살 수가 없었습니다.
안이 이 지경인데, 바깥에서는 더 무서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어요.
중국이 영국에게 졌습니다.
그 거대한 중국이요.
아편전쟁이라는 사건인데, 서양의 대포 앞에 중국이 무릎을 꿇은 거예요.
그 소식이 조선에 전해지자 사람들은 공포에 떨었습니다.
"중국도 졌는데, 우리는 어떡하지?"
그 사이 천주교라는 낯선 종교가 조선에 퍼지고 있었어요.
천주교는 "모든 사람은 하느님 앞에 평등하다"고 말했습니다.
신분제에 짓눌린 백성들에게는 솔깃한 이야기였죠.
하지만 조선 조정은 천주교를 위험한 사상으로 보고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였습니다.
안에서는 백성이 굶고, 밖에서는 서양 배가 다가오고, 새로운 종교는 퍼지는데 조정은 답이 없고.
최제우는 이 혼란 한가운데서 생각했습니다.
"서양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도(道)가 있어서 저렇게 강하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우리의 도가 없는 걸까?"
그는 답을 찾기로 했습니다.
경주 근처에 용담정이라는 작은 정자가 있었습니다.
산속 조용한 곳, 바람 소리와 새 소리만 들리는 곳이에요.
최제우는 이곳에 틀어박혀 수련을 시작했습니다.
명상하고, 기도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어요.
그러다 1860년 음력 4월 5일,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하늘(한울님)의 목소리를 들은 겁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겁내지 마라.
세상 사람들이 나를 상제(하느님)라 부르는데,
너는 상제를 모르느냐?"
최제우가 물었어요.
"그러면 서양 사람들처럼 천주교를 믿으라는 건가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아니다. 나에게는 영부가 있고, 그 가르침은 서양의 것과 다르다.
내 도를 세상에 펴라."
이 경험이 진짜 초자연적인 것이었는지, 깊은 명상 끝에 찾아온 깨달음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중요한 건 이날 이후 최제우가 세상에 내놓은 핵심 메시지예요.
그 메시지를 이해하려면 비유 하나가 필요합니다.
스마트폰을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손에 있는 스마트폰은 전 세계 인터넷에 연결되어 있죠?
그런데 스마트폰 자체가 인터넷은 아니에요.
인터넷은 거대하고 눈에 보이지 않지만, 스마트폰을 통해 연결할 수 있습니다.
최제우는 이렇게 말한 겁니다.
"모든 사람은 하늘과 연결된 스마트폰이다."
그가 쓴 표현은 시천주(侍天主).
'하늘님을 모신다'는 뜻인데, 여기서 핵심은 하늘이 저 먼 하늘 위에 있는 게 아니라 이미 모든 사람 안에 있다는 거예요.
왕 안에도 하늘이 있고, 농민 안에도 하늘이 있고, 여자 안에도 하늘이 있고, 노비 안에도 하늘이 있다.
이것이 동학(東學)의 핵심이었습니다.
서양의 학문(서학, 천주교)에 대응해서 '동쪽의 학문'이라는 뜻으로 이름 지었어요.
천주교가 "하느님이 하늘 위에서 인간을 내려다본다"고 말한 것과 달리,
동학은 "하늘은 밖이 아니라 네 안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 차이가 얼마나 큰지 아시겠어요?
하늘이 밖에 있으면, 누군가 하늘과 나 사이를 중개해 줘야 합니다.
성직자, 왕, 높은 사람.
하지만 하늘이 내 안에 있으면?
아무도 나와 하늘 사이에 끼어들 수 없습니다.
동학은 들불처럼 퍼졌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평생 "너는 천한 놈"이라는 소리를 듣고 살던 사람에게 누군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 안에 하늘이 있습니다. 당신은 왕과 똑같은 존재입니다."
이 말을 들은 농민이, 노비가, 가난한 여인이 어떤 기분이었을까요.
아마 평생 처음으로 눈물이 났을 겁니다.
불과 2~3년 만에 동학을 믿는 사람이 수만 명으로 불어났어요.
사람들은 최제우가 알려준 주문(시천주 조화정)을 외우며 모였습니다.
조선 조정은 처음에 무시했어요.
"미신에 빠진 어리석은 백성들" 정도로 봤죠.
그런데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사람이 곧 하늘이다."
이 문장을 끝까지 따라가면 무서운 결론에 도달하거든요.
노비도 하늘이면, 노비 제도는 하늘을 가두는 것이 됩니다.
왕이 백성을 함부로 하면, 하늘을 함부로 하는 것이 됩니다.
양반이 상놈을 때리면, 하늘을 때리는 것이 됩니다.
이건 단순한 종교가 아니었어요.
조선이라는 나라의 뼈대, 즉 신분제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사상이었습니다.
마치 학교에서 "사실 교장 선생님도 학생도 똑같은 사람이니까, 교장 선생님 말을 꼭 들을 필요 없어"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해요.
학교가 가만히 있을까요?
1863년, 조정은 최제우를 잡아들였습니다.
죄목은 혹세무민(惑世誣民) — "세상을 혼란스럽게 하고 백성을 속였다"는 것.
그리고 1864년 3월, 대구 관덕정에서 최제우는 처형당했습니다.
나이 마흔.
사형장에서 그는 의연했다고 전해집니다.
자신이 뿌린 씨앗이 결코 죽지 않을 것을 알았던 걸까요.
조선은 최제우를 죽이면 동학이 사라질 거라 생각했습니다.
정반대였어요.
최제우의 제자 최시형이 뒤를 이어 동학을 더 크게 키웠습니다.
"사람을 하늘처럼 대하라"는 뜻의 사인여천(事人如天)이라는 가르침을 더했어요.
그로부터 30년 뒤인 1894년, 마침내 폭발이 일어났습니다.
동학농민혁명.
전라도 고부에서 시작된 이 혁명에서, 수만 명의 농민이 죽창을 들고 일어섰어요.
"사람이 하늘이라면, 하늘답게 대접받아야 한다!"
그들의 요구는 단순했습니다.
탐관오리를 물리치고, 신분 차별을 없애고, 외세의 침입을 막아 달라.
비록 이 혁명은 일본군의 개입으로 무참히 진압되었지만, 그 정신은 죽지 않았어요.
동학은 이후 천도교라는 이름으로 이어졌고, 1919년 3·1 운동의 핵심 세력이 되었습니다.
3·1 운동의 민족대표 33인 중 15명이 천도교 인사였어요.
한 사람의 깨달음이 종교가 되고,
종교가 혁명이 되고,
혁명이 독립운동이 된 겁니다.
최제우가 남긴 가장 강력한 유산은 어쩌면 사상 자체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하나의 질문이에요.
여러분은 오늘 옆 사람을 '하늘'처럼 대했나요?
편의점 알바생에게, 배달 기사님에게, 같은 반 친구에게.
그 사람 안에도 하늘이 있다는 것을 기억했나요?
160년 전에 죽은 한 몰락 양반의 외침은 아직도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네 앞에 있는 그 사람이, 바로 하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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