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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벌린은 자유를 둘로 나눴어요. 하나는 남이 나를 막지 않는 '소극적 자유'로 간섭이 없는 상태고, 다른 하나는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는 '적극적 자유'로 스스로를 다스리는 상태예요. 둘 다 진짜 자유이지만 뜻이 달라서, 섞어 쓰면 억압을 '자유'로 포장하는 데 이용될 수 있어요.
친구가 "이번 주말엔 자유롭게 놀아"라고 했다고 해볼게요.
이 말은 두 가지로 들릴 수 있어요.
하나는 "아무도 너를 막지 않을게, 하고 싶은 대로 해"라는 뜻이에요.
또 하나는 "네가 진짜 원하는 걸 찾아서 그 주인이 되어 봐"라는 뜻이에요.
앞엣것은 방해가 없는 상태고, 뒤엣것은 내가 나를 이끄는 상태예요.
아이작 벌린은 1958년 강연 '두 가지 자유 개념(Two Concepts of Liberty)'에서 바로 이 둘을 나눴어요.
방해가 없는 자유를 소극적 자유(negative liberty), 곧 '~로부터의 자유'라고 불렀어요.
남이나 국가가 나를 간섭하지 않는 상태죠.
내가 나의 주인이 되는 자유는 적극적 자유(positive liberty), 곧 '~를 향한 자유'라고 불렀어요.
스스로를 다스리고 실현하는 상태예요.
이 구분은 지금도 정치에서 '자유'를 말할 때 가장 기본이 되는 잣대로 남아 있어요.
벌린은 20세기에 독재 정권들이 '해방'을 내세우며 사람들을 억누르는 걸 두 눈으로 봤어요.
"너희를 진짜 자유롭게 해주겠다"면서 실제로는 감옥을 지었죠.
그는 '자유'라는 아름다운 말이 어떻게 폭정을 옹호하는 데 쓰이는지 알고 싶었어요.
그 답은 적극적 자유가 뒤틀릴 때 나와요.
"너의 진짜 자아(true self)는 이걸 원해"라고 누군가 대신 정해 버리면, 내 뜻과 달라도 "이게 진짜 너의 자유야"라며 강요할 수 있거든요.
벌린은 이런 위험을 경고하려고 두 자유를 또렷하게 갈라놓았어요.
참고로 이 구분은 벌린이 아무것도 없는 데서 새로 만든 게 아니라, 이미 있던 자유주의 전통을 깔끔하게 정리한 거예요.
그는 두 자유가 논리적으로는 멀지 않지만 역사에서는 반대 방향으로 자라났다고 봤어요.
표로 정리하면 이래요.
| 구분 | 소극적 자유 | 적극적 자유 |
|---|---|---|
| 한마디로 | ~로부터의 자유 | ~를 향한 자유 |
| 핵심 | 간섭의 부재 | 자기지배 |
| 던지는 질문 | 나를 막는 게 없는가 | 나는 내 삶의 주인인가 |
| 예 | 아무도 내 방문을 잠그지 않음 | 내가 원하는 삶을 스스로 정함 |
| 뒤틀릴 위험 | 방치와 약육강식 | '진짜 자아'를 명분 삼은 강요 |
두 자유는 서로 원수가 아니에요.
방해가 없어야(소극적) 내가 나를 이끌 수 있고(적극적), 반대로 내가 나를 이끌 힘이 있어야 방해 없는 상태가 값어치를 갖죠.
다만 어느 쪽을 앞세우느냐에 따라 정치의 방향이 크게 달라져요.
많은 사람이 "벌린은 적극적 자유를 나쁘다고 했다"고 오해해요.
그렇지 않아요.
벌린은 두 자유 모두를 진짜 소중한 가치로 인정했어요.
그가 공격한 건 적극적 자유 자체가 아니라, '진짜 자아' 같은 형이상학적 전제를 앞세워 적극적 자유를 왜곡하고, 그 이름으로 억압을 정당화하는 방식이었어요.
그는 이렇게 적었어요.
"Freedom for the wolves has often meant death to the sheep."
우리말로 옮기면 '늑대에게 주어진 자유는 종종 양의 죽음을 뜻했다'예요.
강한 자에게 무제한의 자유를 주면 약한 자가 짓밟힐 수 있다는 뜻이죠.
그래서 자유는 늘 "누구의, 무엇을 위한 자유인가"를 함께 물어야 해요.
아이작 벌린은 1909년 6월 6일 러시아 제국령 라트비아 리가에서 유대계로 태어났어요.
페트로그라드에서 1917년 2월 혁명을 직접 목격했고, 1920년 가족과 함께 영국으로 옮겨 갔어요.
1957년 옥스퍼드의 치첼리 사회·정치이론 석좌교수가 되었고, 이듬해 취임 강연으로 '두 가지 자유 개념'을 발표했어요.
그의 또 다른 핵심 생각은 가치 다원주의(value pluralism)예요.
진짜 소중한 가치들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고, 서로 부딪치며, 하나의 잣대로 잴 수 없다(통약 불가능)는 거예요.
그래서 가치가 충돌할 때 '단 하나의 정답'은 없다고 봤어요.
유명한 에세이 '고슴도치와 여우(The Hedgehog and the Fox)'(1953)도 이 생각과 이어져요.
제목은 고대 그리스 시인 아르킬로코스의 단편 "a fox knows many things, but a hedgehog knows one big thing"(여우는 많은 것을 알지만 고슴도치는 큰 것 하나를 안다)에서 따왔어요.
모든 걸 하나의 체계로 모으는 사람(고슴도치)과 다양함에 이끌리는 사람(여우)을 나눈 거죠.
이 밖에 '카를 마르크스' 전기(1939), '자유에 관한 네 편의 에세이'(1969) 같은 책을 남기고, 1997년 11월 5일 옥스퍼드에서 세상을 떠났어요.
벌린의 결론은 간단해요.
자유는 하나가 아니라 둘이에요.
남이 나를 막지 않는 소극적 자유와, 내가 나를 다스리는 적극적 자유죠.
둘 다 진짜 자유이지만 뜻이 다르기 때문에, "너를 자유롭게 해주겠다"는 말이 나올 때는 그게 어느 쪽 자유인지, 혹시 내 뜻을 대신 정하려는 건 아닌지 물어야 해요.
자유를 둘로 나눠 보는 이 습관 하나가, 좋은 말로 포장된 억압을 알아채는 눈이 되어 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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