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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몽테뉴의 관용(tolérance)은 '너를 봐준다'는 뜻이 아니라, 내가 진리를 다 아는 게 아니니 나와 믿음이 다른 사람을 함부로 벌하거나 없앨 수 없다는 태도예요. 확신이 약해서가 아니라, 확신을 겸손하게 다뤘기 때문에 나온 관용이에요.
반 친구가 나랑 완전히 다른 걸 좋아하고, 다른 걸 믿는다고 해 볼게요.
보통 우리는 '쟤는 틀렸어'라고 쉽게 말해요.
그런데 잠깐 멈춰서 '내가 100% 옳다고 어떻게 확신하지?'라고 되묻는 순간, 상대를 억지로 바꾸거나 벌줄 마음이 조금 줄어들어요.
이게 몽테뉴가 말한 관용의 씨앗이에요.
관용(tolérance)은 원래 '견디다'라는 말에서 왔어요.
나와 다른 생각을 지우지 않고 그냥 곁에 두고 견디는 거예요.
미셸 드 몽테뉴(1533~1592)는 프랑스의 사상가로, 평생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며 <수상록>이라는 책을 썼어요.
그 태도의 밑바닥에 바로 이 관용이 깔려 있어요.
몽테뉴가 살던 16세기 프랑스는 같은 나라 사람들이 믿음이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를 죽이던 시대였어요.
몽테뉴는 그 한복판에 서 있었죠.
그는 가톨릭 국왕 샤를 9세의 시종이면서, 동시에 훗날 국왕(앙리 4세)이 되는 신교 편의 나바르의 앙리를 섬기는 시종이기도 했어요.
두 진영 모두와 신뢰를 주고받은 드문 사람이었던 거예요.
양쪽에 다리를 걸친 게 잔꾀가 아니었어요.
그는 '내 믿음이 옳다'는 확신만으로 사람을 해치는 일에 몸서리를 쳤어요.
확신이 칼이 되는 시대를 직접 봤으니까요.
그래서 그의 글은 '누가 이기느냐'보다 '어떻게 하면 서로 견디며 살 수 있느냐'를 자꾸 되물어요.
몽테뉴는 1576년쯤 자기 이름을 새긴 메달을 만들면서 두 문구를 넣었어요.
프랑스어로 'Que sais-je?'(크 세 주), 곧 '나는 무엇을 아는가?'예요.
또 하나는 그리스어 'Epecho'(에페코), '나는 판단을 유보한다'는 뜻이고요.
이 두 문구가 관용의 열쇠예요.
'나는 무엇을 아는가?'는 내가 아는 게 생각보다 적다는 고백이에요.
내가 다 안다고 믿으면 남을 가르치고 벌하려 들지만, '나도 잘 모른다'를 인정하면 남의 생각을 밟을 자격이 사라져요.
확신이 얕아서가 아니라, 확신을 함부로 무기 삼지 않으려는 겸손이 관용을 만든 거예요.
| 확신에 찬 사람 | 몽테뉴의 태도 |
|---|---|
| 나는 진리를 안다 | 나는 무엇을 아는가? |
| 틀린 자를 벌한다 | 판단을 잠시 멈춘다 |
| 다름을 없앤다 | 다름을 곁에 두고 견딘다 |
몽테뉴의 유명한 글 '식인종에 관하여'는 관용을 잘 보여줘요.
그는 먼 나라의 낯선 풍습을 '야만'이라 부르는 우리를 향해 물어요.
우리가 야만이라 부르는 건 사실 '우리와 다른 것'일 뿐 아니냐고요.
이 생각은 뒷날 '문화 상대주의의 원조'라 불릴 만큼 앞서 있었어요.
다만 오해하면 안 돼요.
몽테뉴는 '뭐든 다 괜찮다, 옳고 그름은 없다'까지 간 사람은 아니에요.
그는 관습을 넘어선 '이성'이나 '자연' 같은 기준이 여전히 있다고도 봤어요.
그러니까 그의 관용은 '아무 판단도 하지 말자'가 아니라, '내 기준만이 유일한 잣대라고 우기지 말자'에 가까워요.
지금도 사람들은 정치, 종교, 취향이 다르다고 서로를 쉽게 '틀렸다'고 몰아세워요.
몽테뉴의 관용은 그럴 때 한 박자 멈추게 해요.
'내가 정말 다 아는가?'라고요.
이 물음은 소신을 버리라는 게 아니라, 내 소신을 남을 해치는 칼로 쓰지 말라는 부탁이에요.
나와 다른 사람을 지우지 않고 견디며 함께 사는 힘, 그게 몽테뉴가 400여 년 전에 미리 살아 보인 태도예요.
몽테뉴의 관용은 '내가 옳다는 확신을 겸손하게 다루기'에서 나와요.
'나는 무엇을 아는가?'라는 물음이 남을 함부로 단죄하지 못하게 붙잡아 주고, '식인종에 관하여'는 낯선 것을 '야만'이라 부르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하게 해요.
종교 전쟁의 한복판에서 양쪽 모두를 섬긴 그의 삶이, 다름을 없애지 말고 견디며 함께 살자는 이 태도를 증명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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