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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퍼트넘은 마음을 '뇌가 어떤 재료로 되어 있느냐'가 아니라 '그 상태가 어떤 역할을 하느냐'로 보자고 했어요. 이렇게 마음을 역할로 설명하려는 생각이 바로 기능주의의 출발입니다.

여러분이 가장 좋아하는 게임 하나를 떠올려 보세요. 그 게임은 값비싼 데스크톱에서도 돌아가고, 몇 년 된 낡은 노트북에서도 돌아가고, 손바닥만 한 휴대폰에서도 돌아가요. 안에 든 부품은 저마다 다른데도 똑같은 게임이 펼쳐져요. 게임을 게임으로 만드는 건 '어떤 기계로 만들어졌나'가 아니라 '무슨 일을 하느냐', 곧 규칙과 움직임이기 때문이에요. 미국 철학자 힐러리 퍼트넘은 1926년에 태어나 2016년에 세상을 떠난 분석철학자예요. 그는 1960년대에 깜짝 놀랄 질문을 던졌어요. 혹시 우리 마음도 게임처럼, 재료가 아니라 '하는 일'로 정해지는 것 아닐까? 이 글은 그 질문에서 태어난 '기능주의'라는 생각을 처음부터 따라가 봐요.

퍼트넘 이전의 많은 학자는 마음을 뇌의 특정 상태와 똑같은 것으로 생각했어요. 예를 들어 '아픔'은 뇌의 어떤 신경이 켜진 상태, 딱 그것이라고요. 쉽게 말하면 마음을 시계 속 특정 톱니바퀴 하나로 보는 셈이에요. 그 톱니가 돌면 아픔, 다른 톱니가 돌면 기쁨, 이런 식으로요. 언뜻 깔끔해 보이지만 퍼트넘은 여기에 걸리는 점을 느꼈어요. 만약 아픔이 '사람 뇌의 바로 그 부품'이라면, 그 부품이 없는 존재는 영영 아플 수 없다는 이상한 결론이 나오거든요.

그래서 퍼트넘은 비유를 바꿔요. 초인종을 떠올려 볼게요. 초인종은 '누가 누르면, 소리가 나서, 안에 있던 사람이 나와 보게 만드는' 역할로 정해져요. 그 안에 전기 회로가 들었든 옛날식 쇠종이 매달렸든 상관없어요. 그 일만 해내면 모두 초인종이에요. 퍼트넘은 마음도 이렇게 보자고 했어요. 아픔이란 뇌의 특정 부품이 아니라, '몸이 다치면 생겨나고, 아야 소리를 내게 하고, 다친 곳을 자꾸 피하게 만드는' 역할이라는 거예요.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가 아니라 무슨 일을 하는지가 그 상태를 아픔으로 만들어요. 마음을 이렇게 '역할'로 설명하는 생각이 바로 기능주의예요.

이 생각의 가장 멋진 점이 여기 있어요. 아픔이 '역할'이라면, 그 역할을 해내는 것은 무엇이든 아픔을 가질 수 있어요. 문어의 신경계는 사람 뇌와 생김새가 아주 다르지만, 다치면 몸을 움츠리고 그 자리를 피해요. 그러니 문어도 나름의 방식으로 아픔을 느낀다고 말할 수 있어요. 똑같은 한 곡을 피아노로도 기타로도 연주할 수 있는 것과 비슷해요. 악기는 달라도 멜로디는 같죠. 언젠가 로봇이 같은 역할을 하는 회로를 갖춘다면, 그 로봇의 아픔도 진지하게 이야기할 수 있고요. 하나의 마음 상태를 여러 다른 재료가 만들어낼 수 있다는 이 점이 기능주의의 심장이에요.

퍼트넘은 마음에서 멈추지 않고 '말의 뜻'도 다시 물었어요. 1975년에 그는 '쌍둥이 지구'라는 유명한 상상을 내놓아요. 우리 지구와 똑같이 생긴 별이 하나 있다고 해 봐요. 그곳 사람들도 강과 비를 '물'이라 불러요. 그런데 그 물은 사실 우리 물, 곧 H2O가 아니라 겉모습과 맛만 똑같은 다른 물질이에요. 핵심은 이거예요. 지구의 나와 쌍둥이 지구의 나는 머릿속 생각이 글자 하나까지 똑같아요. 그런데도 내가 말하는 '물'과 그가 말하는 '물'은 서로 다른 것을 가리켜요. 그래서 퍼트넘은 "말의 뜻은 머리 안에만 있지 않다"고 했어요. 뜻은 우리가 실제로 발 딛고 사는 바깥세상과도 이어져 있다는 거죠. 이렇게 뜻이 바깥 사물에 기대어 정해진다는 생각을 의미의 외재성이라고 불러요.

퍼트넘은 마음을 재료가 아니라 '하는 일'로 보자고 했어요. 그래서 사람도 문어도, 어쩌면 로봇도 같은 아픔을 가질 수 있다는 기능주의가 태어났어요. 또 쌍둥이 지구라는 상상으로, 말의 뜻이 머릿속에만 갇혀 있지 않고 바깥세상과도 닿아 있음을 보여 줬고요. 마음도 의미도 '안에 든 재료'가 아니라 '역할과 관계'로 보자는 것, 그것이 퍼트넘이 우리에게 남긴 가장 큰 생각이에요. 재미있는 건 퍼트넘 자신도 나중에는 기능주의를 스스로 비판했다는 점이에요. 답을 정해 놓지 않고 끝없이 다시 묻는 그 태도야말로, 가장 철학자다운 모습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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