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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1945년 8월 6일, 모리스 윌킨스는 자신이 만든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그날부터 그는 죽음의 과학을 떠나기로 했다.
1944년 윌킨스는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에서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 중이었다.
맨해튼 프로젝트란 미국이 원자폭탄을 개발하기 위해 물리학자 수천 명을 모은 비밀 계획이다.
윌킨스의 역할은 우라늄 동위원소 분리, 한마디로 폭탄 연료를 정제하는 일이었다.
히로시마 소식이 들렸을 때, 그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공장 노동자가 아니라 설계자였으니까.
자기가 만든 도구가 수십만 명을 죽였다는 사실이 그를 완전히 뒤흔들었다.
1946년, 그는 오스트리아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의 책 '생명이란 무엇인가' 를 읽었다.
"살아있다는 게 물리학으로 설명될 수 있을까?" 슈뢰딩거가 던진 그 질문 앞에서 윌킨스는 방향을 완전히 틀었다.
물리학을 버리고 분자생물학으로 간 거다.
가장 파괴적인 무기를 만든 손이 이번엔 생명의 비밀을 찾아 나섰다.
그 선택이 그를 10년 뒤 노벨상으로, 동시에 50년간의 후회로 이끌게 된다.

윌킨스와 로잘린드 프랭클린은 30미터 안에서 같은 분자를 연구했다.
하지만 둘은 거의 2년간 서로의 데이터를 본 적이 없었다.
1951년, 프랭클린이 런던 킹스 칼리지에 합류했다.
그녀는 X선 결정학 전문가였는데, X선 결정학이란 분자에 X선을 쏴서 그 회절 패턴으로 분자 구조를 알아내는 기술이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분자를 사진으로 찍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문제는 첫날부터 생겼다.
연구소장이 두 사람에게 역할을 모호하게 설명한 거다.
윌킨스는 프랭클린이 자기 보조 연구원으로 왔다고 이해했고, 프랭클린은 자신이 독립적인 프로젝트를 맡았다고 이해했다.
결국 두 사람은 같은 복도에서 같은 DNA를 연구하면서도 데이터를 공유하지 않는 상태가 됐다.
신입이 같은 팀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직책 분쟁 중인 회사 풍경이랑 비슷하다.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생물학 수수께끼를 풀어야 할 팀이, 사실 팀이 아니었던 셈이다.
그래서 진짜 팀처럼 움직이는 곳은 따로 있었다.
케임브리지의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이었다.
그리고 윌킨스는 결국 가장 나쁜 방식으로 그 둘과 이어지게 된다.

1953년 1월의 어느 오후, 윌킨스는 서랍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그 사진을 본 제임스 왓슨은 그 자리에서 답을 알았다.
그 사진이 바로 'Photo 51' 이다.
프랭클린이 찍은 B형 DNA의 X선 회절 사진으로, DNA 이중나선 구조를 증명하는 결정적 증거가 담겨 있었다.
사진 속엔 X자 모양의 선명한 패턴이 있었는데, 그게 나선형 구조라는 직접적인 신호였다.
왓슨은 나중에 이렇게 썼다.
"사진을 보는 순간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는 X 패턴의 간격을 눈으로 측정하면서 머릿속에서 나선을 그렸다.
하지만 그 사진은 프랭클린의 것이었다.
윌킨스는 그녀의 허가 없이, 케임브리지에서 경쟁 연구를 하던 왓슨에게 그 사진을 꺼내 보여줬다.
동료가 작성 중인 핵심 자료를 경쟁팀에 슬쩍 넘긴 것과 같은 상황이다.
두 달 뒤인 1953년 3월, 왓슨과 크릭은 DNA 이중나선 구조 모델을 발표했다.
20세기 가장 위대한 생물학 발견의 결정적 순간이 그렇게 만들어졌다.

윌킨스는 노벨상 메달을 들고도 50년간 그 오후를 놓지 못했다.
끝내 마무리하지 못한 일이 하나 있었기 때문이다.
1962년, 윌킨스는 왓슨, 크릭과 함께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수상 연설에서 그는 프랭클린을 언급했지만, 상은 이미 셋이 나눠가진 뒤였다.
프랭클린은 1958년 난소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37세였다.
노벨상은 살아있는 사람에게만 수여된다.
그래서 Photo 51을 찍은 사람, 이중나선의 가장 결정적인 증거를 직접 만든 사람은 수십 년간 역사에서 제대로 다뤄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윌킨스를 "이중나선의 세 번째 남자"라고 불렀다.
왓슨과 크릭이 주인공이고 자신은 조연이라는 뜻이 담긴 자조적인 표현이었다.
그는 그 별명을 평생 안고 살았다.
2003년, 그는 86세에 자서전을 출간했다.
제목은 'The Third Man of the Double Helix', 이중나선의 세 번째 남자였다.
그 책에서 그는 1953년 1월의 오후를 기록했다. 변명 대신 사실로, 해명 대신 고백으로.
1년 뒤 그는 세상을 떠났다.
노벨상이 인생의 정점이자 동시에 가장 무거운 짐이었던 사람.
당신이라면 그 메달을 어떻게 바라봤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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