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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필즈상을 받기 20년 전, 허준이는 수학이 아니라 시를 쓰고 있었다.
1983년생인 그는 십대 시절 내내 시에 빠진 청년이었다.
수학 성적은 그냥 평범했고, 수학에 특별한 흥미도 없었다.
서울대학교에 입학할 때 그가 택한 전공도 수학이 아니었다.
천문학과 물리학이었다.
오늘날 세계 수학계가 "수십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천재"라고 부르는 사람의 이야기치고는 어딘가 어색하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건 그리 낯선 이야기가 아니다.
학교 다닐 때 가장 지루하고 싫던 과목을 어른이 되어서야 좋아하게 된 경험, 한 번쯤 있지 않나요?
허준이에게 수학은 딱 그 과목이었다.

허준이가 수학을 진지하게 시작한 건 학부 마지막 학기, 70대 일본 노교수의 텅 빈 강의실에서였다.
2007년 무렵, 서울대 학부 6년 차를 보내던 그는 특별 강의 안내를 우연히 보게 됐다.
강사는 히로나카 헤이스케, 1970년에 필즈상을 받은 일본의 전설적인 수학자였다.
필즈상은 4년마다 한 번, 40세 미만의 수학자 중 최고에게만 수여하는 상이다.
노벨상이 없는 수학 분야에서 사실상 최고 영예로 통한다.
그 수상자가 직접 서울대에서 강의를 연다니, 처음에는 강의실이 꽤 찼을 것이다.
그런데 강의가 시작되자 학생들이 하나둘 빠져나갔다.
내용이 너무 어렵고 난해했기 때문이다.
결국 강의실에 남은 거의 유일한 학생이 바로 허준이였다.
히로나카의 눈에 끝까지 자리를 지킨 그 청년이 들어왔다.
강의가 끝난 뒤 둘은 대화를 나눴고, 히로나카는 자연스럽게 허준이의 멘토가 됐다.
우연히 들어간 강연 한 번이 그의 진로를 통째로 바꾼 순간이었다.

지금 프린스턴이 그를 모셔갔지만, 17년 전 미국 명문 대학원 10곳은 그를 거절했다.
서울대 석사를 마친 뒤 허준이는 미국 박사 과정 약 11곳에 지원했다.
합격 통보를 보내온 곳은 단 한 곳, 일리노이대학교 어배너-섐페인뿐이었다.
취업 면접을 열한 곳에 봤는데 열 곳에서 떨어지고 한 곳에만 붙은 격이다.
당시 허준이는 학부 6년 만에 수학으로 방향을 바꾼 늦깎이였다.
논문 실적도 변변치 않았으니 서류에서 걸러진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한 곳에서 그는 제대로 피어났다.
박사 과정을 마친 뒤 미시간대학교를 거쳐 프린스턴 고등연구소로 이어지는 길이 열렸다.
그를 거절한 열 곳의 입학 담당자들이 2022년 뉴스를 봤다면 어떤 기분이었을까.

허준이는 새벽까지 책상에 매달린 천재가 아니다.
그는 매일 8시간을 자고, 집중해서 일하는 시간은 하루 3~4시간이라고 인터뷰에서 직접 밝혔다.
산책을 즐기고,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을 그 무엇보다 소중히 여긴다.
그런 방식으로 일하면서도 그는 수십 년 묵은 수학 난제 두 개를 연속으로 풀어냈다.
리드 추측과 로타 추측, 각각 세계 수학자들이 수십 년간 씨름하다 포기한 문제들이다.
두 문제 모두 언뜻 무관해 보이는 수학 분야들을 대담하게 연결해야 풀리는, 그 발상 자체가 막혀 있던 난제였다.
그 결과로 2022년, 그는 필즈상을 받았다.
수상 소식이 전해지자 한국에서는 "하루 4시간 집중"이라는 문장이 "필즈상"만큼이나 뜨겁게 회자됐다.
야근 12시간이 아니라 산책 30분이 난제를 풀었다는 이야기, 과로를 미덕으로 여기는 문화에 조용히 부딪힌다.
시인을 꿈꿨던 청년이 텅 빈 강의실에서 수학자가 됐고, 열 번의 거절 뒤에도 결국 세계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그게 어쩌면 허준이가 증명한, 수식 밖의 가장 인간적인 정리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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