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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스물여섯 살 한나 아렌트는 8일 만에 게슈타포 건물 정문을 걸어 나왔어요.
그날 이후 그녀는 다시는 독일 국적을 되찾지 않았죠.
1933년 봄, 베를린의 프로이센 국립도서관에서 아렌트는 반유대주의 선전물을 몰래 수집하고 있었어요.
나치가 막 권력을 잡은 직후라 유대인을 표적으로 삼는 분위기가 독일 전체를 뒤덮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만 게슈타포에 걸렸어요.
게슈타포는 나치 독일의 비밀경찰이에요.
한번 잡히면 살아서 나오기 어려운 곳이었죠.
하지만 아렌트는 8일 만에 나왔어요.
당시 게슈타포가 막 조직을 꾸리던 시기라 절차가 허술했던 탓도 있었어요.
더 결정적인 건 아렌트가 심문하는 젊은 경관과 며칠 동안 끈질기게 대화를 나눴다는 점이에요.
공항 보안검색대에서 민감한 물건이 걸렸는데 담당자와 30분 잡담하다 통과되는 상황, 다만 그 담당자가 나치라는 게 달랐죠.
아렌트는 당시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사랑' 개념을 주제로 철학 박사 논문을 막 끝낸 학자였어요.
사랑을 연구한 학자가 자신을 잡은 나치 경관을 말로 설득해 풀려난 셈이죠.
그녀는 풀려나자마자 어머니와 함께 체코 국경을 걸어서 넘어 망명길에 올랐어요.

발터 벤야민이 스페인 국경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그날, 아렌트의 가방 속에는 그가 맡긴 원고가 있었어요.
벤야민은 당시 유럽을 대표하는 독일계 유대인 비평가였죠.
1940년, 나치가 파리를 점령하자 프랑스 정부는 유대인을 '적국인'으로 분류해 수용소에 가뒀어요.
아렌트도 남부의 귀르 수용소에 수감됐죠.
하지만 프랑스 행정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탈출에 성공했어요.
탈출 후 마르세유에서 그녀는 벤야민을 만났어요.
그는 스페인을 거쳐 미국으로 도망칠 계획을 세우면서 자신의 논문 원고 묶음을 아렌트에게 맡겼죠.
며칠 뒤 벤야민은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 국경에 도착했어요.
그런데 그날따라 국경 경비대가 입국을 거부했어요.
다음 날이면 풀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는 그날 밤 모르핀 과다복용으로 사망했어요.
생사의 경계는 국경 담당자의 그날 지시 하나였어요.
아렌트는 살아남았고, 벤야민의 원고를 품에 안고 결국 미국까지 건너가 그의 글들이 세상에 나올 수 있게 했어요.

아이히만은 악마처럼 보이지 않았어요.
아렌트는 바로 그 사실이 가장 무섭다고 썼죠.
1961년,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역사적인 재판이 열렸어요.
피고는 아돌프 아이히만, 나치 시절 수백만 명의 유대인을 강제수용소로 이송하는 실무를 맡았던 관료였어요.
아렌트는 미국 잡지 '뉴요커'의 특파원 자격으로 그 법정에 직접 앉았어요.
그녀가 본 건 뿔 달린 괴물이 아니었어요.
안경을 쓰고 정장을 입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중년 관료였죠.
아이히만이 법정에서 한 말은 이거였어요. "나는 명령을 따랐을 뿐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승진 외에 관심이 없었어요."
아렌트는 이 말이 거짓말이 아님을 알아챘어요.
악은 광기에서 오는 게 아니라, 생각하기를 멈춘 자리에서 자라난다는 결론이었죠.
그 개념이 바로 '악의 평범성'이에요. 영어로는 banality of evil, 악이 특별한 괴물이 저지르는 게 아니라 아무 생각 없이 시스템을 따르는 평범한 사람이 저지른다는 뜻이에요.
회사에서 누가 봐도 문제인 업무를 아무 생각 없이 엑셀로 처리하는 중간관리자를 떠올려보세요.
그 무감각이 체계와 만났을 때 어떤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 아렌트는 그 경고문을 역사에서 읽어낸 거예요.
1963년 출간된 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그 보고서였어요.

그녀를 버린 건 세상이 아니라 같은 유대인 친구들이었어요.
그리고 그 이유의 절반은 30년 전 한 독일 남자였죠.
책이 나오자 유대계 지식인 사회가 발칵 뒤집혔어요.
단순히 나치 전범의 '평범성'을 말했기 때문만이 아니었어요.
책에서 일부 유대인 지도자들이 나치에 협조했다는 내용을 서술한 게 불에 기름을 부었죠.
유대 신비주의 학자 게르숌 숄렘이 공개서한을 보냈어요.
"당신의 글에서 유대 민족에 대한 사랑을 찾을 수 없다."
수십 년 지기였던 친구들이 하나씩 연락을 끊었어요.
하지만 아렌트를 향한 의심에는 더 깊은 뿌리가 있었어요.
그녀는 열여덟 살 때 스승 마르틴 하이데거의 연인이었거든요.
하이데거는 20세기 최고의 철학자 중 하나로 꼽히지만, 나치 집권 직후 나치당에 입당한 인물이기도 해요.
전쟁이 끝난 뒤 하이데거는 나치 부역 이력 때문에 강단에서 쫓겨났어요.
아렌트는 그의 복귀를 공개적으로 지지했고, 자신의 책에 헌정의 말을 적었죠.
나치를 피해 목숨 걸고 도망쳤던 여자가, 나치 당원이던 스승을 끝까지 감싼 거예요.
동료들은 '아이히만을 평범하다고 부른 그녀'와 '하이데거를 용서한 그녀'가 같은 사람임을 뒤늦게 떠올렸어요.
아렌트 곁에 남은 우정은 거의 없었어요.
게슈타포에서 살아 나온 그 스물여섯 살이, 결국 자기 편에게 버림받은 채 생을 마감했다면, 우리는 그 아이러니를 어떻게 불러야 할까요.
TTS 음성이 없어요.
아래 버튼으로 나레이션을 생성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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