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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1898년 청나라의 젊은 개혁가 담사동은 개혁이 실패하자 도망칠 수 있었는데도 남았어요. 변법(제도 개혁)은 피 흘려야 이뤄지는데 아직 아무도 그 피를 흘리지 않았으니, 그 피를 나부터 흘리겠다며 스스로 처형장으로 걸어간 거예요. '무술변법과 순교'는 그 103일의 개혁과 그가 택한 마지막을 가리켜요.
담사동(譚嗣同, 1865년부터 1898년)은 《인학仁學》을 쓴 근대 사상가예요.
오늘은 그의 철학이 아니라, 그가 목숨을 건 정치 개혁 '무술변법(戊戌變法)'에만 좁게 집중할게요.
먼저 아주 짧은 배경만요.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에 지고,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타이완을 넘겨주고 은 2억 5천만 냥을 물어주게 돼요.
담사동은 여기에 크게 분노하며 '나라를 통째로 고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느껴요.
마치 비가 샐 때마다 대야를 받치는 대신 지붕 전체를 다시 얹기로 마음먹은 셈이죠.
그래서 그는 고향 후난에서 시무학당·남학회 같은 학교와 모임을 만들고, 1898년 4월에는 신문 《상보湘報》를 창간해 개혁을 널리 알려요.
이 신문은 상하이 《시무보》, 톈진 《국문보》와 함께 전국 3대 유신 신문으로 꼽혔어요.
이런 활약 덕에 그는 1898년 젊은 황제 광서제에게 발탁되어 4품경함 군기장경(軍機章京)이라는 자리에 올라요.
개혁파 중에서 가장 높은 관료가 된 거예요.
광서제와 담사동은 신식 학교, 철도, 산업을 한꺼번에 밀어붙였어요.
그런데 진짜 권력은 황제의 큰어머니뻘인 서태후가 쥐고 있었죠.
개혁은 곧 그 권력을 흔드는 일이라, 두 세력이 정면으로 부딪쳐요.
다급해진 담사동은 1898년 9월 18일 밤, 군대를 가진 위안스카이(袁世凱)를 파화사(法華寺)로 찾아가요.
서태후의 심복 룽루(榮祿)를 없애고 서태후를 가둬 달라고 부탁한 거예요.
하지만 위안스카이는 오히려 이 계획을 룽루에게 밀고해 버려요.
믿고 판을 맡긴 사람에게 등을 찔린 셈이죠.
9월 21일 서태후가 정변을 일으켜 광서제에게서 실권을 빼앗고, 황제를 중난하이 잉타이에 가둬요.
훗날 베이징대학이 되는 경사대학당(京師大學堂) 하나만 빼고 개혁 정책은 전부 폐지돼요.
이렇게 개혁은 시작한 지 103일 만에 끝나요.
그래서 '백일유신'이라고 불러요.
정변이 나자 캉유웨이와 량치차오 같은 동료들은 일본으로 망명해요.
담사동은 달랐어요.
9월 24일 베이징 류양회관에서 체포될 때까지 그는 도망치지 않고 남아요.
자신의 죽음이 개혁의 불씨가 되리라 믿었기 때문이에요.
그가 남긴 말이 이 선택을 잘 보여줘요.
各國變法,無不從流血而成。今中國未聞有因變法而流血者,此國之所以不昌者也。有之,請從嗣同始。
풀이하면 이래요.
"세상의 모든 개혁은 피 흘림 없이 이뤄진 적이 없다. 그런데 지금 중국에는 개혁 때문에 피 흘린 사람이 있었다는 말을 아직 못 들었으니, 이것이 나라가 번창하지 못하는 까닭이다. 그런 사람이 있어야 한다면, 나 사동부터 시작하기를 청한다."
그는 또 이렇게도 말해요.
不有行者,無以圖將來;不有死者,無以酬聖主.
"떠나는 자가 없으면 앞날을 도모할 수 없고, 죽는 자가 없으면 성군(광서제)의 은혜에 보답할 수 없다"는 뜻이에요.
망명한 동료도, 남아서 죽는 자기도 둘 다 필요하다고 본 거죠.
1898년 9월 28일 오후, 담사동은 베이징 쉬안우문 밖 차이스커우(菜市口) 형장에서 참수돼요.
이때 함께 처형된 여섯 사람을 '무술육군자(戊戌六君子)'라 불러요.
담사동, 양선수, 임욱, 유광제, 강광인, 양예예요.
그의 마지막 말로 널리 알려진 구절은 이래요.
有心殺賊,無力回天。死得其所,快哉!快哉!
"썩은 체제라는 도적을 없애려 마음먹었으나 하늘을 돌이킬 힘이 없구나. 죽을 자리에서 죽으니, 통쾌하다! 통쾌하다!"라는 뜻이에요.
다만 한 가지는 짚어 둘게요.
중국 측 기록을 보면, 목이 잘리기 직전 그가 갑자기 '吾有一言(나에게 한 마디가 있다)!'이라고 외쳤는데 감독관 강의(剛毅)가 이를 무시했다고 해요.
그래서 정작 그가 하려던 말은 전해지지 않아 지금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어요.
처형 뒤 그의 시신은 어릴 적 무술 스승이던 대도왕오(大刀王五)가 위험을 무릅쓰고 수습해, 1899년 고향 후난 류양으로 옮겨 묻어요.
아들의 개혁에 반대했던 아버지 담계순마저 모든 관직을 빼앗기고 낙향했어요.
무술변법은 광서제와 담사동이 나라를 통째로 고치려 한 103일의 개혁이었고, 위안스카이의 밀고와 서태후의 정변으로 무너졌어요.
담사동은 망명 대신 죽음을 택하면서 '개혁은 피 흘려야 이뤄지니 그 피를 나부터 시작하겠다'고 했고, 무술육군자의 한 사람으로 처형됐어요.
그의 마지막 외침 한 마디는 끝내 전해지지 않았지만, 도망칠 수 있었는데도 남아 첫 희생자가 되기를 자청한 그 선택이 순교로 기억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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