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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투리야는 깨어있음·꿈·깊은 잠이라는 세 가지 마음 상태 밑에 늘 그대로 있는 '넷째 자리'예요. 세 상태는 왔다 사라지지만 그걸 지켜보는 '나'는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는데, 라마나 마하르시는 바로 그 변하지 않는 자각을 우리의 참자아로 봤어요.
투리야(Turīya)는 산스크리트어로 그냥 '넷째'라는 뜻이에요.
뭐가 넷째냐고요?
하루를 떠올려 봐요.
눈 뜨고 활동하는 시간, 잠들어 꿈꾸는 시간, 꿈도 없이 푹 자는 깊은 잠.
우리 의식은 매일 이 세 상태를 빙글빙글 돌아요.
그런데 투리야는 이 셋 중 하나가 아니에요.
세 상태 밑에 늘 깔려 있으면서, 셋이 바뀌든 말든 변하지 않고 그저 지켜보는 넷째죠.
영화관을 떠올리면 쉬워요.
스크린 위에서 낮 장면, 밤 장면, 깜깜한 장면이 계속 바뀌어요.
하지만 스크린 자체는 어떤 장면이 나와도 젖거나 타거나 하지 않고 그대로 있어요.
깨어있음·꿈·깊은 잠이 '장면'이라면, 투리야는 그 모든 장면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스크린'이에요.
세 상태와 넷째를 나란히 놓으면 차이가 또렷해져요.
| 상태 | 무엇을 겪나 | 계속 있나 |
|---|---|---|
| 깨어있음 | 몸과 바깥 세상을 경험 | 잠들면 사라짐 |
| 꿈 | 마음이 지어낸 세상을 경험 | 깨거나 깊이 자면 사라짐 |
| 깊은 잠 | 아무것도 없이 고요함 | 깨어나면 사라짐 |
| 투리야(넷째) | 위 셋을 지켜보는 순수한 자각 | 사라진 적이 없음 |
앞의 셋은 전부 왔다가 가요.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서 "아, 잘 잤다"고 말하잖아요.
이게 좀 이상해요.
깊은 잠 속엔 아무것도 없었다면서, 그 '아무것도 없음'을 누가 알아챈 걸까요?
없음마저 지켜본 무언가가 잠자는 내내 깨어 있었다는 뜻이에요.
그 지켜본 자리가 바로 투리야예요.
투리야는 라마나 마하르시가 만든 말이 아니라 인도 베단타 전통에 오래 있던 개념이에요.
다만 그는 이걸 머릿속 이론이 아니라 자기 몸으로 겪었어요.
1896년 열여섯 살 때, 그는 갑자기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방바닥에 누워 죽는 상황을 스스로 연기했어요.
그러면서 "무엇이 죽는가"를 파고들었죠.
그때 그가 발견한 건 이거예요.
"몸 위에서 작용하는 하나의 힘 혹은 전류, 에너지의 중심이었으며, 몸이 굳어 있든 활동하든 상관없이 몸과 연결된 채로 지속되었다. 바로 그 전류, 힘 혹은 중심이 나의 참자아를 이루었다."
몸은 죽어도 사라지지 않고 남는 그 자각, 그것이 투리야가 가리키는 자리예요.
그는 또 '나-나'(Aham)라는 안쪽의 자각은 참자아를 가리키고, '나는 이것이다·저것이다'(Aham idam)는 껍데기인 에고를 가리킨다고 나눴어요.
몸도 이름도 기분도 바뀌지만, 그 밑에서 "나는 있다"고 그냥 아는 것은 늘 그대로죠.
그게 넷째예요.
그래서 그는 투리야를 저 멀리 가야 닿는 곳으로 두지 않았어요.
병들어 죽어가며 신도들이 낫게 해달라 애원할 때도 이렇게 말했죠.
"내가 어디로 가겠는가? 나는 여기 있다."
가장 흔한 오해는 투리야를 '특별한 무아지경에 빠지는 것'으로 여기는 거예요.
눈 감고 앉아 세상을 잊는 깊은 명상 상태(삼매)에 들어야만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죠.
하지만 라마나는 삼매는 일시적인 상태일 뿐이라고 봤어요.
삼매는 마음의 버릇을 잠깐 눌러 둘 뿐 없애지는 못한다고요.
투리야는 힘줘서 도달하는 상태가 아니라, 이미 여기 늘 켜져 있는 자각을 알아보는 것에 가까워요.
스크린은 애써 만드는 게 아니라 원래부터 거기 있었으니까요.
라마나가 하루 종일 삼매에 앉아 아무것도 안 했다는 이미지도 사실과 달라요.
그는 아쉬람에서 요리도 하고 나뭇잎 접시도 손수 기웠어요.
넷째 자리는 눈 감고 멍하니 있는 게 아니라, 채소를 썰고 밥을 짓는 그 한복판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자각이에요.
투리야는 특별한 사람만 갖는 초능력이 아니에요.
아침에 깊은 잠에서 막 깨어나 아직 아무 생각도 시작되지 않은 그 짧은 틈, "내가 여기 있구나" 하고 그냥 아는 그 순간에 이미 살짝 얼굴을 내밀어요.
하루 종일 기분이 바뀌고 생각이 오가고 몸이 지쳐도, 그 모든 걸 알아채는 자리는 아침의 그것과 똑같아요.
라마나 마하르시가 말한 넷째란, 어디 도망가서 찾을 게 아니라 지금 이 글을 읽는 동안에도 조용히 지켜보고 있는 바로 그것이에요.
투리야는 산스크리트어로 '넷째'라는 뜻이고, 깨어있음·꿈·깊은 잠이라는 세 상태 밑에 늘 변함없이 있는 순수한 자각을 가리켜요.
세 상태는 스크린 위 장면처럼 왔다 가지만 스크린인 투리야는 사라진 적이 없어요.
라마나 마하르시는 열여섯 살의 죽음 체험에서 몸이 죽어도 남는 이 자각을 참자아로 발견했고, 그것을 저 멀리가 아니라 '지금 여기'로 가리켰어요.
특별한 삼매에 빠져야 닿는 게 아니라, 밥 짓고 잠에서 깨는 평범한 순간에도 이미 켜져 있는 자리라는 것.
이 한 가지만 기억하면 충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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