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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주자 절대주의는 주자(주희)가 유교 경전에 달아 놓은 해석을 유일한 정답으로 놓고, 거기서 벗어난 풀이는 학문이 아니라 바른 질서를 어지럽히는 죄로 본 태도예요. 송시열은 '주자가 이미 다 밝혀 놓았으니 우리는 그대로 따르면 된다'고 믿었어요.
송시열(1607년부터 1689년까지 살았어요)은 조선 후기 노론의 우두머리이자, 임금 두 사람인 효종과 현종의 어린 시절 스승이었던 학자예요.
조선왕조실록에 삼천 번 넘게 이름이 나올 만큼 그 시대 사상계를 쥐고 흔든 사람이죠.
그런데 이 글에서 다룰 건 그 화려한 이력이 아니라, 그가 평생 붙든 원칙 하나, '주자 절대주의'예요.
주자 절대주의를 쉽게 비유하면 이래요.
시험에서 선생님이 나눠 준 '모범 답안지'가 딱 하나 있고, 그 답안지와 조금이라도 다르게 풀면 아무리 그럴듯해도 틀린 걸로 처리하는 거예요.
송시열에게 그 모범 답안지는 남송의 학자 주자(주희)가 유교 경전에 달아 놓은 해석이었어요.
주자가 '논어의 이 구절은 이런 뜻이다'라고 정해 놓았으면, 그게 곧 정답이고, 다르게 읽으면 틀린 거였죠.
송시열이 어릴 때, 아버지 송갑조가 이렇게 가르쳤어요.
"주자(朱子)는 후세의 공자이고 율곡(栗谷)은 후세의 주자이니, 공자를 배우려면 마땅히 율곡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쉽게 말해 '공자에서 주자로, 다시 율곡(이이)으로' 이어지는 정답의 계보가 있고, 그 줄만 따라가면 길을 잃지 않는다는 거예요.
실제로 송시열은 이론에서도 이황의 이기호발설을 물리치고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을 지지하며 이 계보를 이어받았어요.
여기엔 시대의 이유도 있었어요.
송시열이 살던 조선 후기는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무릎 꿇은 직후라, 나라의 자존심이 바닥이었어요.
이런 때일수록 '우리가 지켜야 할 참된 도리가 무엇인지' 흔들리지 않는 기준이 필요하다고 본 거죠.
주자의 해석은 그 흔들리지 않는 기준점 역할을 했어요.
그는 죽는 순간까지 이 믿음을 놓지 않았어요.
임종 때 제자 권상하의 손을 잡고 "학문은 마땅히 주자(朱子)를 주(主)로 할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거든요.
이 원칙이 얼마나 강했는지 보여주는 장면이 있어요.
송시열의 옛 친구였던 윤휴가 경전을 주자와 다르게, 자기 방식대로 해석하며 이렇게 말했어요.
"천하의 이치를 어찌 주자 혼자만 안단 말인가?"
지금 우리 귀엔 꽤 용감하고 합리적인 말로 들리죠.
하지만 송시열은 이걸 그냥 다른 의견으로 넘기지 않았어요.
그는 윤휴를 '사문난적(斯文亂賊)', 곧 '유학이라는 바른 학문(斯文)을 어지럽히는 도적'이라 부르며 관계를 끊어 버렸어요.
| 물음 | 송시열 | 윤휴 |
|---|---|---|
| 경전을 어떻게 읽나 | 주자 해석을 그대로 따른다 | 내가 직접 다시 해석한다 |
| 주자와 다른 풀이는 | 도를 어지럽히는 죄 | 얼마든지 가능한 학문 |
| 판단 기준 | 주자가 옳으면 옳다 | 이치에 맞으면 옳다 |
한 모임에서는 또 다른 친구 윤선거에게 '주자가 옳으냐, 윤휴가 옳으냐'고 다그쳤고, 윤선거는 "흑백으로 본다면 주희는 백, 윤휴는 흑"이라 답할 수밖에 없었어요.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색깔부터 정하고 들어가는 분위기였던 거죠.
송시열에게 주자를 의심하는 건 단순한 학문 논쟁이 아니라 도(道)를 무너뜨리는 일이었어요.
여기서 오해하기 쉬운 게 있어요.
주자만 떠받들었으니 모든 면에서 꽉 막힌 사람이었겠거니 하는 거죠.
그런데 실제 송시열은 양반에게도 세금(군포)을 물리는 호포제, 어머니 신분을 따르게 하는 노비종모법, 서얼 등용, 과부의 재혼 허용 같은 제도 개혁을 주장했어요.
딸과 며느리에게 한글로 편지(계녀서)를 써 보내고 경전을 한글로 옮겨 여성에게 가르치기도 했고요.
그러니까 그의 '절대주의'는 세상 모든 일을 옛날 방식으로 묶어 두자는 게 아니라, '학문의 정답만은 주자 하나로 통일하자'는 좁고 단단한 원칙이었어요.
사회 제도는 바꿀 수 있어도, 진리의 기준만은 흔들 수 없다는 거였죠.
주자 절대주의는 장점과 그늘을 함께 남겼어요.
하나의 확고한 기준이 있으니 학문이 어지럽게 흩어지지 않았고, 조선 후기 사상계는 그 덕에 단단한 뼈대를 갖췄어요.
하지만 정답을 하나로 못 박는 순간,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은 '틀린 사람'이 아니라 '나쁜 사람'이 되기 쉬웠어요.
윤휴를 도적이라 부른 게 그 예죠.
송시열 자신도 이 길이 험하다는 걸 알았어요.
자손에게 남긴 유서에서 그는 "맹자와 주자가 사설(邪說)을 물리치되 죽도록 미워하기를 마치 원수처럼 여기는 데에 이르렀던 것"을 본받았다며, 그래서 유배당하는 참사를 겪었지만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어요.
그에게 주자를 지키는 일은 목숨을 건 신념이었던 거예요.
정답지 하나만 인정하는 태도, 그게 송시열의 주자 절대주의예요.
세 가지로 묶어 볼게요.
첫째, 그는 남송의 주자가 경전에 붙인 해석을 유일한 정통으로 삼았어요.
둘째, 그래서 주자와 다르게 읽은 윤휴를 '사문난적'이라 부르며 내쳤어요.
셋째, 그 원칙은 학문의 기준을 흔들리지 않게 잡아 주는 힘이 됐지만, 다른 생각을 죄로 모는 그늘도 함께 남겼어요.
정답이 하나뿐이라는 믿음이 어떻게 힘이 되고 또 벽이 되는지, 송시열은 그 두 얼굴을 한 사람 안에 담고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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