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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작용즉성(作用卽性)은 밥 먹고 걷고 말하는 일상의 모든 작용(用)이 곧 부처의 본성(性)이 드러난 모습이라는 마조 도일의 가르침이에요. 마음 밖 어딘가에서 따로 부처를 찾을 필요가 없다는 뜻이죠.
마조 도일(馬祖道一, 709년부터 788년까지)은 중국 당나라 때 홍주종(洪州宗)을 연 선사예요.
그가 남긴 가르침 가운데 하나가 바로 '작용즉성(作用卽性)'이에요.
글자 그대로 풀면 '작용(作用)이 곧 본성(性)'이라는 뜻이에요.
여기서 본성은 그냥 성격을 말하는 게 아니라, 누구에게나 있다는 '부처의 성품', 곧 불성(佛性)을 가리켜요.
조금 더 쉽게 말해 볼게요.
밥을 먹고, 손을 흔들고, 길을 걷고, 누가 부르면 고개를 돌리는 그 모든 움직임 — 마조는 바로 그게 부처의 본성이 지금 이 순간 드러나고 있는 모습이라고 봤어요.
부처를 저 멀리 하늘이나 죽은 뒤의 세상에서 찾을 게 아니라, 지금 내 몸이 하고 있는 작용 안에 이미 부처가 들어 있다는 이야기죠.
그래서 '작용이 곧 본성'이라고 한 거예요.
마조 이전에도 '누구에게나 불성이 있다'는 생각은 있었어요.
문제는 그 불성이 어디에 있느냐였죠.
학자 지아 진화(Jinhua Jia)에 따르면, 마조의 '불성이 작용(用)으로 드러난다'는 생각은 화엄(華嚴)의 성기(性起) 사상에서 직접 영향을 받았다고 해요.
화엄에서는 맑고 깨끗한 불성이 세상의 온갖 현상을 낳으면서도, 그 불성 자체는 영원히 더러워지지 않는다고 봤어요.
그런데 마조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갔어요.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이 뒤섞인 사람의 자연스러운 일상 마음, 바로 그 마음 자체를 곧 불성이라고 본 거예요.
표로 정리하면 이래요.
| 구분 | 화엄의 성기 | 마조의 작용즉성 |
|---|---|---|
| 불성의 자리 | 현상 뒤에 있는 맑은 본체 | 일상 마음과 작용 그 자체 |
| 순수와 오염 | 불성은 언제나 오염되지 않음 | 뒤섞인 일상 마음이 곧 불성 |
이 차이가 왜 중요할까요?
화엄식으로 보면 우리는 더러운 현상을 걷어내고 그 뒤의 맑은 본체를 애써 찾아야 해요.
하지만 마조식으로 보면 찾을 것이 따로 없어요.
지금 화내고 웃고 졸린 이 마음 그대로가 이미 부처의 작용이니까요.
비유를 하나 들어 볼게요.
전깃불을 생각해 봐요.
우리는 '전기'라는 걸 눈으로 직접 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불이 켜지고, 선풍기가 돌고, 냉장고가 웅웅거릴 때 우리는 '아, 전기가 흐르는구나' 하고 알죠.
전기는 이런 '작용'을 통해서만 자기를 보여 줘요.
마조가 말한 불성도 이것과 비슷해요.
불성은 어디 숨어 있는 물건이 아니라, 지금 손을 드는 그 작용, 눈을 깜빡이는 그 작용으로 그때그때 나타나는 거예요.
그래서 마조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은 스승에게 '부처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을 때, 곧바로 답을 듣기보다 갑작스러운 외침(喝)이나 손찌검, 발길질 같은 파격적인 방식을 만나곤 했어요.
떠나는 제자를 갑자기 이름 불러 세워 홱 돌아보게 만들기도 했고요.
머리로 '부처란 이런 것이겠지' 하고 따지던 습관을 순간적으로 깨뜨려서, 지금 놀라 돌아보는 바로 그 살아 있는 작용을 스스로 느끼게 하려던 거예요.
부처는 설명 속이 아니라 그 반응 속에 있다는 거죠.
한 가지 덧붙이면, '외침(喝)'은 그냥 '소리치다'라는 평범한 한자예요.
이걸 서양에서 '옐드 카츠(yelled katsu)'처럼 신비한 주문인 양 옮긴 탓에 괴이한 기행처럼 부풀려진 면이 있어요.
원래는 그저 크게 소리쳐 정신을 번쩍 들게 한 것뿐이에요.
여기서 자연스럽게 의문이 생겨요.
모든 작용이 다 불성이라면, 나쁜 짓을 해도 그게 부처의 작용이니 괜찮다는 말이 되는 걸까요?
실제로 이 지점을 날카롭게 파고든 사람이 있었어요.
규봉종밀(圭峰宗密, 780년부터 841년까지)이에요.
종밀은 마조의 홍주종이 '모든 것을 다 참되다'고 여기는 급진적인 가르침을 편다고 비판했어요.
착한 행동이든 나쁜 행동이든 가리지 않고 전부 불성의 나타남이라고 긍정해 버리면, 옳고 그름의 구분이 사라지고 어떤 행동이든 정당화될 수 있다는 거죠.
이렇게 도덕의 기준을 허무는 위험을 어려운 말로 반율법주의(antinomianism)라고 불러요.
그러니 작용즉성은 '무엇을 해도 상관없다'는 방종의 허가증이 아니에요.
오히려 마조가 노린 건, 부처를 나 밖의 대단한 무언가로 미뤄 두고 정작 지금 이 순간을 흘려보내는 태도를 뒤집는 것이었어요.
다만 그 말이 자칫 도덕적 방향을 잃을 수 있다는 종밀의 지적도 함께 기억해 두면, 이 가르침을 훨씬 균형 있게 읽을 수 있어요.
작용즉성(作用卽性)은 '작용이 곧 본성'이라는 뜻으로, 밥 먹고 걷고 돌아보는 일상의 모든 움직임이 그대로 부처의 본성이 드러난 모습이라는 마조 도일의 가르침이에요.
마조는 화엄의 성기 사상을 이어받되, 맑은 본체를 따로 찾는 대신 순수와 오염이 뒤섞인 일상 마음 자체를 불성으로 봤다는 점이 새로웠어요.
그래서 부처는 설명 밖 살아 있는 작용 속에 있다고 본 거죠.
다만 종밀이 지적했듯 '모든 행동이 다 옳다'는 방종으로 오해될 위험도 함께 안고 있으니, 지금 이 순간을 귀하게 살라는 초대이자 조심스레 읽어야 할 말로 기억해 두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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