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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수레를 이루는 바퀴와 축과 몸체를 아무리 뒤져도 '수레 그 자체'라고 딱 짚을 것은 나오지 않지만, 그 부품들이 알맞게 모이면 우리는 그것을 '수레'라 부르며 잘 탑니다. 찬드라키르티는 이 평범한 사실을 일곱 방향으로 꼼꼼히 따져서, '나'를 비롯한 모든 것이 홀로 선 실체가 아니라 조건에 기대어 이름 붙은 것임을 보였어요.
찬드라키르티(한자로 월칭月稱)는 600년쯤 인도 날란다 사원에서 활동한 중관학파 승려예요.
그는 《입중론入中論》(산스크리트로 마디아마카바타라)이라는 책에서 아주 유명한 비유 하나를 듭니다.
바로 '수레'예요.
장난감 자동차를 떠올려 볼까요.
바퀴, 축, 몸체, 손잡이를 하나씩 따로 놓고 "이게 자동차야?"라고 물으면 아무도 그렇다고 하지 않아요.
그런데 이 부품들을 알맞게 조립하면 우리는 곧바로 "자동차다" 하고 부르며 굴립니다.
찬드라키르티는 여기서 이상한 점을 짚어요.
부품 어디에도 '자동차 그 자체'는 없는데, 자동차는 분명히 쓰이고 있잖아요.
그러면 자동차라는 것은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요?
이 물음을 수레에 대고 일곱 가지 방향으로 끝까지 따진 것이 '일곱 수레 비유'입니다.
찬드라키르티는 수레가 그 부품들과 어떤 관계인지를 일곱 갈래로 나눠 하나씩 부정해요.
"이래도 아니고, 저래도 아니다"를 반복하는 방식이에요.
| 따져 보는 방향 | 왜 수레가 아닐까 |
|---|---|
| 1. 부품과 똑같은 하나다 | 그러면 부품이 여럿이니 수레도 여럿이어야 해요 |
| 2. 부품과 완전히 별개다 | 부품을 다 치우면 따로 남는 수레가 없어요 |
| 3. 수레가 부품을 소유물처럼 가진다 | '가진 나'와 '가진 부품'이 또 따로 있어야 해서 무너져요 |
| 4. 수레가 부품에 얹혀 있다 | 얹힐 수레가 미리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없어요 |
| 5. 부품이 수레에 얹혀 있다 | 이것도 얹힐 수레가 먼저 있어야 하니 마찬가지예요 |
| 6. 부품을 쌓아 모은 무더기다 | 부서진 부품을 자루에 담아도 수레라 안 하잖아요 |
| 7. 부품이 이룬 모양이다 | 모양은 부품이 놓인 배치일 뿐, 따로 있는 물건이 아니에요 |
일곱 방향을 다 막고 나면 남는 결론은 하나예요.
부품과 따로도, 부품과 같지도 않은 '진짜 수레'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죠.
그런데도 수레는 잘 굴러갑니다.
이 어긋남이 바로 비유의 핵심이에요.
여기서 오해하기 쉬워요.
"수레가 없다니, 그럼 다 헛것이란 말이야?" 하고요.
찬드라키르티의 답은 아니에요.
그가 없다고 한 것은 '자성自性'(산스크리트로 스바바바svabhāva)이에요.
자성이란 다른 무엇에도 기대지 않고 홀로 제 힘으로 서 있는 본성을 말해요.
수레에는 그런 자성이 없어요.
부품과 조립과 이름이라는 조건이 갖춰졌을 때 비로소 '수레'가 성립하니까요.
조건에 기대어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공空(순야타)의 뜻이에요.
그래서 '없다'가 아니라 '홀로 선 알맹이가 없다'가 정확한 말이에요.
수레는 조건 속에서 멀쩡히 있고, 우리는 그것을 타고 물건을 나릅니다.
찬드라키르티는 다른 중관 논사들과 달리 세속의 차원에서조차 이 자성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특히 철저했어요.
사실 수레는 진짜 주인공이 아니에요.
찬드라키르티가 겨누는 것은 '나'입니다.
수레 자리에 '나'를 놓고, 부품 자리에 몸과 마음의 요소들, 곧 오온五蘊을 놓아 보세요.
찬드라키르티는 《오온론》이라는 책을 따로 쓰기도 했지요.
우리는 몸과 감각과 생각이 모인 것을 '나'라고 부르지만, 그 요소들을 하나씩 뒤져도 '나 그 자체'는 나오지 않아요.
수레와 똑같아요.
'나'도 부품과 같지도, 별개이지도 않고, 소유하지도, 얹혀 있지도 않아요.
일곱 방향 어디에도 홀로 선 '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사라지는 건 아니에요.
조건이 모여 '나'라 불릴 뿐이라는 것을, 수레라는 친근한 물건을 통해 눈앞에 보여 준 거예요.
딱딱한 논리를 손에 잡히는 장난감으로 바꿔 놓은 셈이죠.
일곱 수레 비유는 '수레는 부품 밖에 따로 없지만 부품만 쌓아도 수레가 아니다'라는 어긋남을 일곱 방향으로 못 박은 이야기예요.
찬드라키르티가 이 비유로 없앤 것은 수레의 존재가 아니라, 홀로 서 있다는 착각인 자성입니다.
그리고 이 수레 자리에 '나'를 넣어 보면, 나 역시 조건에 기대어 이름 붙은 것임이 드러나요.
다음에 자동차나 자전거를 볼 때, 부품 어디에 '그것 자체'가 있나 한 번 찾아보세요.
못 찾는 그 순간이 바로 찬드라키르티가 가리킨 지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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