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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유식학파는 바깥 사물은 없어도 그것을 비추는 마음만은 진짜로 있다고 봤어요. 찬드라키르티는 그 마음조차 홀로 설 '자성'이 없기는 마찬가지라고 받아쳤어요.
찬드라키르티(월칭)는 대략 600년경부터 650년경까지 인도 날란다 사원에서 활동한 중관학파 불교 철학자예요.
'찬드라'는 산스크리트어로 '달의 영광'을 뜻해서, 한자로는 달 월(月) 자를 써서 월칭(月稱)이라 불려요.
그는 《입중론(入中論)》이라는 책에서 당시 크게 유행하던 유식학파를 조목조목 반박했어요.
유식학파(유가행파)의 한마디는 "오직 마음뿐"이에요.
우리가 보는 컵, 나무, 사람은 사실 바깥에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마음이 그린 그림 같은 거라는 거예요.
꿈을 떠올리면 쉬워요.
꿈속 사과는 진짜 사과가 아니지만, 그 꿈을 꾸는 '마음'은 있잖아요.
유식학파는 세상을 이 꿈처럼 봐요.
바깥 사물은 없어도 그걸 비추는 의식은 실제로 있다고요.
찬드라키르티는 바로 이 지점을 문제 삼았어요.
찬드라키르티가 보기에 유식학파의 잘못은 '한쪽만 봐준' 데 있어요.
그는 유식을 일종의 주관적 관념론, 그러니까 "세상은 결국 내 마음이 만든 것"이라는 생각으로 이해하고 반박했어요.
비유를 들어 볼게요.
거울과 거울에 비친 얼굴이 있다고 해요.
유식학파는 "비친 얼굴(바깥 사물)은 가짜지만 거울(마음)은 진짜"라고 말하는 셈이에요.
그런데 찬드라키르티는 되물어요.
비친 얼굴이 혼자 힘으로 존재할 수 없다면, 그 얼굴을 비추는 거울도 얼굴 없이는 '비추는 거울'이 될 수 없지 않냐고요.
보는 마음과 보이는 대상은 짝으로만 성립해요.
그러니 대상이 자성(自性), 곧 홀로 설 알맹이가 없다면, 마음도 똑같이 자성이 없어야 앞뒤가 맞아요.
여기서 자성이라는 말이 핵심이에요.
자성은 '다른 것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는 딱딱한 알맹이'를 뜻해요.
찬드라키르티는 다른 중관 학자들보다도 더 철저해서, 세속의 차원에서조차 이 자성을 인정하지 않았어요.
바깥 사물의 자성만 지우고 마음의 자성은 남겨 두는 유식학파는, 그가 보기에 절반만 비운 셈이었죠.
유식학파에는 '아뢰야식(장식)'이라는 특별한 개념이 있어요.
우리 마음 깊은 곳에 모든 경험의 씨앗이 저장되는 창고 같은 의식이에요.
마치 하드디스크처럼, 지금은 안 보여도 지난 행동의 기록이 차곡차곡 쌓여 다음 삶으로 이어진다는 거예요.
유식학파는 또 세상 만물을 세 가지 성질로 나눠 설명하는 삼성설(三性說)도 폈고요.
찬드라키르티는 이 아뢰야식을 '끝까지 참인 가르침'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그는 《능가경(楞伽經)》을 근거로 들어, 아뢰야식은 방편으로 잠깐 세운 가르침, 곧 불요의(不了義)라고 봤어요.
불요의란 '아직 완전하지 않은, 이해를 돕기 위한 임시 설명'이라는 뜻이에요.
아이에게 "산타가 선물을 준다"고 말해 착하게 굴도록 이끄는 것과 비슷해요.
틀린 말이라서가 아니라, 진짜 뜻으로 데려가기 위한 디딤돌인 거죠.
찬드라키르티는 아뢰야식이라는 창고를 진짜 있는 실체로 붙잡으면, 결국 '비워야 할 자성'을 하나 더 만드는 꼴이라고 봤어요.
이 비판이 얼마나 뜨거운 주제였는지 보여 주는 일화가 있어요.
찬드라키르티는 문법학자이자 재가 학자였던 찬드라고민(월관, 月官)과 오랜 논쟁을 벌였어요.
찬드라키르티는 중관 입장을, 찬드라고민은 유식 입장을 들고 맞섰죠.
티베트 역사서를 남긴 부뙨과 타라나타의 기록에 따르면, 이 논쟁은 무려 7년이나 이어졌고 큰 군중이 몰려들었대요.
재미있는 건, 두 기록 모두 누가 이겼는지는 밝히지 않는다는 점이에요.
찬드라고민이 관세음보살에게 몰래 배웠다는 이야기도 전해지지만, 이건 검증된 사실이 아니라 '전설'로 남아 있어요.
타라나타의 《인도불교사》에 실린 동요는 그 분위기를 이렇게 노래해요.
"噫嘻龙树论,有药亦有毒,慈氏无著论,是群生甘露(아아, 용수의 논서는 약이자 독이고, 미륵과 무착의 논서는 뭇 중생의 감로로다)."
중관과 유식, 두 흐름이 팽팽히 맞섰다는 걸 짐작하게 해 주죠.
찬드라키르티의 유식학파 비판은 한 문장으로 요약돼요.
"마음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유식학파가 바깥 사물을 비우면서도 그것을 비추는 마음만은 진짜로 남겨 두자, 그는 마음도 대상과 짝으로만 있으니 똑같이 자성이 없다고 받아쳤어요.
마음 깊은 창고인 아뢰야식도 끝까지 참인 가르침이 아니라 임시 방편(불요의)이라고 봤고요.
바깥이든 안이든 홀로 선 알맹이는 어디에도 없다는 거예요.
이 철저함이 그의 유식 비판을 관통하는 하나의 생각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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