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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진리를 세속제와 승의제 둘로 나누되, 세속의 사물조차 고정된 본질(자성)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찬드라키르티 이제설의 핵심이에요. 즉 세상은 '없는 게 아니라 약속으로 성립할 뿐'이라는 뜻이에요.
반에서 "1번 자리"라고 하면 다들 어디인지 알죠.
그런데 그 자리가 원래부터 '1번'이라는 도장이 찍혀 태어난 건 아니에요.
우리가 그렇게 정했을 뿐이에요.
찬드라키르티(月稱, 대략 600년에서 650년경 활동한 인도 날란다 사원의 중관학파 학자)가 말한 세속의 진리가 딱 이래요.
그는 진리를 두 층으로 나눠서 봤어요.
이걸 이제(二諦), 즉 두 개의 진리라고 불러요.
하나는 세속제(世俗諦, saṁvṛti satya)로, 우리가 일상에서 서로 약속하고 통용하는 진리예요.
다른 하나는 승의제(勝義諦, paramārtha satya)로, 사물의 참모습을 있는 그대로 본 궁극의 진리예요.
"컵에 물이 있다"는 세속제, "그 어떤 것도 스스로 존재하는 고정된 알맹이가 없다"는 승의제인 셈이에요.
그럼 궁극의 진리만 알면 되지, 세속의 진리는 왜 챙길까요?
만약 "모든 게 고정된 본질이 없다"는 말만 붙들고 "그럼 밥도 없고 학교도 없어"라고 해버리면 하루도 살 수가 없어요.
찬드라키르티는 세속의 진리를 무시하지 않아요.
오히려 그 위에 발을 딛고 서야 궁극의 진리로 건너갈 수 있다고 봐요.
게임 규칙을 알아야 게임 속에서 이기고 지듯이, 세속의 약속을 인정해야 그 안에서 인과도 성립하고 가르침도 전할 수 있어요.
세속제는 버릴 대상이 아니라 딛고 올라서는 사다리예요.
여기서 찬드라키르티가 다른 학자들과 갈라져요.
같은 중관학파여도 바비베카(Bhāviveka) 같은 사람은 "궁극에서는 몰라도, 적어도 세속 차원에서는 사물이 제 나름의 본질(自性, svabhāva)을 갖는다고 봐도 된다"고 했어요.
찬드라키르티는 여기서 고개를 저어요.
그는 세속의 차원에서조차 자성을 인정하지 않았어요.
중국어 자료도 그를 두고 '설세속제화승의제개무자성(说世俗谛和胜义谛皆无自性)', 즉 '세속제와 승의제 모두 자성이 없다고 말한다'고 정리해요.
| 구분 | 바비베카 | 찬드라키르티 |
|---|---|---|
| 궁극(승의) 차원 | 자성 없음 | 자성 없음 |
| 세속 차원 | 자성 인정 가능 | 자성 없음 |
무슨 뜻이냐면, 세속의 컵도 '컵 그 자체의 알맹이'가 있어서 컵인 게 아니라, 재료와 쓰임과 이름이 서로 기대어 잠깐 컵으로 성립할 뿐이라는 거예요.
세속은 '가짜'가 아니라 '약속으로 세워진 진짜'예요.
그래서 세속의 사물은 실제로 작동하지만, 그 어디에도 스스로 버티는 본질은 없다는 게 그의 입장이에요.
두 진리가 따로 노는 두 세계처럼 들릴 수 있는데, 사실은 같은 하나를 두 눈으로 보는 거예요.
무지개를 예로 들면, 저기 걸린 무지개는 분명히 보이고(세속제) 사진도 찍히지만, 다가가 손에 쥘 알맹이는 없어요(승의제).
있으면서 비어 있는 거죠.
찬드라키르티가 궁극의 앎을 아주 강하게 표현한 대목도 있어요.
그는 붓다가 되는 순간엔 마음과 심리작용(cittacaitta)이 다 소멸해서, 공성을 아는 것은 아는 대상도 아는 주체도 없는 '무지(non-knowing)'라고 봤어요.
궁극의 진리는 무언가를 붙잡아 아는 게 아니라, 붙잡을 알맹이가 애초에 없음을 보는 자리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세속의 약속을 딛되 그 약속을 절대적 실체로 오해하지 않는 것, 이 균형이 그의 이제설이에요.
찬드라키르티의 이제설은 진리를 세속제와 승의제 둘로 나눠 봐요.
세속제는 우리가 서로 약속해 통용하는 일상의 진리이고, 승의제는 그 무엇에도 고정된 본질이 없다는 궁극의 진리예요.
그가 특별한 점은, 세속 차원에서조차 자성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데 있어요.
세속은 '없는 것'이 아니라 '약속으로 잠깐 성립하는 것'이에요.
우리는 그 사다리를 딛고 서되, 그것을 영원한 알맹이로 착각하지만 않으면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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