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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야즈나발키아는 자신이 최고라고 말하기 전에, 왕의 소 천 마리를 먼저 가져가게 해요.
오늘로 치면 면접장에 들어가자마자 합격 선물부터 챙기는 사람입니다.
아직 질문도 안 받았는데요.
심지어 그 선물은 금 장식까지 단 소 천 마리예요.
장소는 비데하 왕 자나카의 궁정입니다.
자나카는 지혜로운 사람들을 불러 모은 왕이에요.
그는 “여기서 가장 뛰어난 현인에게 이 소들을 주겠다”는 식으로 판을 벌입니다.
그러자 야즈나발키아가 제자에게 말해요.
“이 소들을 우리 집으로 몰고 가거라.”
궁정이 얼어붙었겠죠.
다른 현인들 입장에서는 이런 말이 튀어나온 셈입니다.
“아직 시험 안 봤는데 제가 1등입니다.”
그래서 질문이 쏟아집니다.
사람들은 그를 끌어내리려 해요.
하지만 야즈나발키아는 도망가지 않습니다.
그는 상을 먼저 챙긴 허풍쟁이가 아니었어요.
오히려 질문을 피하지 않는 사람이었죠.
“좋다, 물어보라”는 태도로 그 자리에 서 있습니다.
이 장면이 강한 이유는 단순합니다.
지혜가 겸손한 표정만 하고 나타나지 않는다는 거예요.
때로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먼저 소를 끌고 가는 얼굴로 옵니다.

왕궁의 토론을 멈춰 세운 질문은, 가장 조용히 앉아 있던 여성 현인 가르기에게서 나와요.
가르기 바차크나비는 《브리하다란야카 우파니샤드》에 나오는 여성 철학자입니다.
이 책은 아주 오래된 인도 철학 대화집이에요.
사람들이 삶과 죽음, 나와 우주를 놓고 실제로 묻고 답하는 문헌입니다.
그 자리에는 남성 현인들이 많았을 겁니다.
왕도 있고, 학자들도 있고, 모두가 자기 지식을 들고 앉아 있죠.
그런데 가장 위험한 질문을 던진 사람은 가르기예요.
가르기는 야즈나발키아에게 묻습니다.
하늘과 땅, 그 사이의 모든 것은 무엇에 묶여 있느냐고요.
쉽게 말하면 이런 질문입니다.
“우리가 보는 이 세계 전체를 붙들고 있는 바닥은 뭐죠?”
이건 발표장에서 누군가 손을 들고 말하는 순간과 비슷합니다.
“자료는 좋은데요, 이 발표가 서 있는 가장 밑바닥 가정은 뭔가요?”
그 질문 하나로 방 안의 공기가 바뀝니다.
가르기는 작은 것을 묻지 않았어요.
비가 왜 오느냐, 불이 왜 타느냐를 묻지 않습니다.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마지막 바탕을 찌릅니다.
야즈나발키아도 이 질문의 무게를 압니다.
그는 가르기에게 너무 멀리 몰아붙이지 말라는 식으로 경고합니다.
“더 묻다가는 네 머리가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무서운 말까지 나오죠.
이 말은 여성을 겁주려는 장면으로만 읽기엔 너무 단순합니다.
그만큼 질문이 위험한 곳까지 갔다는 뜻이에요.
가르기는 토론의 장식이 아니라, 토론의 바닥을 흔든 사람입니다.

마이트레이가 원한 것은 더 많은 재산이 아니라, 재산으로 절대 살 수 없는 답이었어요.
야즈나발키아가 집을 떠나려 할 때입니다.
그에게는 두 아내, 마이트레이와 카티야야니가 있어요.
그는 떠나기 전에 재산을 나누어 주려 합니다.
보통이라면 이 장면은 상속 이야기로 끝납니다.
누가 무엇을 얼마나 받는지 따지는 장면이 되겠죠.
그런데 마이트레이는 숫자를 보지 않습니다.
그녀는 묻습니다.
“이 재산으로 내가 죽지 않는 삶을 얻을 수 있나요?”
이 질문 하나가 방의 목적을 바꿉니다.
방금 전까지는 살림살이를 나누는 자리였어요.
그런데 순식간에 인간이 왜 사는지 묻는 자리로 바뀝니다.
야즈나발키아는 솔직하게 답합니다.
재산으로 편안한 삶은 살 수 있어요.
하지만 그것으로 죽지 않는 삶을 살 수는 없습니다.
마이트레이는 여기서 물러서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제게 그것을 말해 주세요.”
돈보다 더 큰 답을 달라고 요구한 겁니다.
야즈나발키아는 사랑에 대해서도 이상한 말을 합니다.
“남편이 사랑스러운 것은 남편 때문이 아니라, 참된 나 때문”이라는 식으로요.
아내, 자식, 재산도 마찬가지라고 말합니다.
처음 들으면 차갑게 들립니다.
하지만 뜻은 반대에 가깝습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사랑하는 가장 깊은 이유는, 그 안에서 내 삶의 근원을 느끼기 때문이라는 말이에요.
그래서 이 장면은 유산 분배가 아닙니다.
떠나는 남편과 남겨지는 아내의 대화도 아닙니다.
한 사람이 “돈으로 안 되는 것을 알고 싶다”고 말하는 순간입니다.

야즈나발키아의 결론은 거창한 신의 이름이 아니라, “너 자신을 보라”는 말에 가까워요.
여기서 아트만이 나옵니다.
아트만은 내 안의 가장 깊은 나예요.
직업, 이름, 기분처럼 바뀌는 내가 아니라, 그 모든 변화를 보고 있는 바닥입니다.
그리고 브라흐만이 나옵니다.
브라흐만은 우주의 근원이에요.
별, 바람, 생명, 생각까지 가능하게 하는 가장 깊은 바탕입니다.
야즈나발키아가 말하는 놀라운 점은 이겁니다.
아트만과 브라흐만은 둘이 아니라는 것.
내 안의 참된 나와 우주의 근원이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이건 “내가 우주 최강이다” 같은 말이 아니에요.
오히려 반대입니다.
작고 시끄러운 자아를 벗겨 내면, 더 깊은 곳에서 우주와 맞닿는다는 뜻입니다.
스마트폰으로 비유하면 이렇습니다.
앱마다 화면은 다릅니다.
하지만 전기가 끊기면 모든 앱이 한꺼번에 꺼집니다.
야즈나발키아가 찾은 것은 앱이 아닙니다.
화면에 뜬 프로필도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을 켜지게 하는 전기 같은 바탕이에요.
그래서 그는 먼 곳으로만 달려가지 않습니다.
왕궁의 논쟁도 통과하고, 가르기의 질문도 통과하고, 마이트레이의 물음도 통과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질문하는 자기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은 흔한 자기계발 문장이 아닙니다.
야즈나발키아에게는 세계의 끝까지 가는 길입니다.
하늘과 땅을 붙든 바탕을 찾다가, 결국 자기 안의 가장 깊은 자리까지 내려가는 일이니까요.
그가 소 천 마리를 먼저 끌고 간 장면이 이제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그는 상을 탐낸 사람이었을까요.
아니면 이미 알고 있었을까요.
가장 큰 논쟁은 왕궁 한가운데서 시작됐지만, 가장 깊은 답은 한 사람의 안쪽에서 열렸다는 것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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