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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1195년경, 이븐 루시드가 매주 진맥하던 군주가 그의 책 전부를 코르도바 광장에 쌓고 불을 붙이라 명령했어요.
이븐 루시드는 12세기 스페인 남부 코르도바에서 태어난 법관이자 왕실 주치의이며, 아리스토텔레스 주석으로 중세 유럽을 뒤흔든 철학자예요.
그 칼리프는 다름 아닌 이븐 루시드가 직접 진료하던 환자였어요.
오늘날로 치면 이런 장면이에요.
30년간 회사 사장의 건강을 책임지던 주치의가 어느 날 출근길에 자기 논문 전부가 회사 로비에서 불타고 있는 걸 본 거예요.
그것을 지시한 사람은 자기가 진료하던 그 사장이고요.
명령을 내린 사람은 무와히드 왕조 3대 칼리프 아부 유수프 알만수르예요.
무와히드 왕조는 당시 북아프리카와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하던 이슬람 제국이고, 칼리프는 종교 지도자와 왕을 겸하는 자리예요.
알만수르는 종교 보수파의 지지가 필요했어요.
그들에게 이븐 루시드의 작업은 위험천만한 것이었어요.
이븐 루시드가 평생 한 일은 아리스토텔레스 저작을 해설하는 것이었거든요.
고대 그리스 철학자가 쓴 논리학·윤리학·자연과학 책들을 이슬람 신앙과 화해시키려 한 거예요.
보수 신학자들은 이성으로 신앙을 따져 묻는 것 자체가 불경하다고 봤어요.
그래서 결국 "철학서를 모두 불태우라"는 명령이 떨어졌어요.
이븐 루시드 본인은 살아 있었지만, 그의 저작은 광장에서 재가 됐어요.

그는 평생 이슬람 법관이었어요.
그런데 그의 만년 주소지는 유대인 마을이었어요.
책 소각 명령과 함께 이븐 루시드는 코르도바에서 추방됐어요.
보내진 곳은 인근의 루세나예요.
루세나는 당시 안달루시아에서 유대 학자들이 모여 사는 대표적인 학문 도시였어요.
그의 나이는 당시 약 70세였어요.
샤리아, 즉 이슬람 종교법을 평생 공부하고 판결을 내려온 법관이 이슬람 사회 바깥의 마을에서 만년을 보내게 된 거예요.
샤리아는 오늘날로 치면 헌법과 민법을 합쳐놓은 것 같은, 이슬람의 최고 법규예요.
평생 한 회사의 법무팀장으로 일하다 정년 1년 앞두고 모든 직위가 박탈된 셈이에요.
그것도 경쟁사 건물로 쫓겨난 거예요.
철학 자체가 공식 금지되고, 그를 따르던 학자들도 박해를 받았어요.
그런데 바로 그 시점, 이슬람 세계에서 이단으로 몰린 그의 사상은 전혀 다른 곳에서 조용히 퍼지고 있었어요.

한쪽 안장엔 시신이, 다른 쪽엔 그가 평생 쓴 책들이 균형을 맞춰 실렸어요.
1198년, 이븐 루시드는 북아프리카 마라케시에서 세상을 떠났어요.
시신은 고향 코르도바로 운구됐는데, 그 방식이 특별했어요.
말 한 마리의 한쪽 안장엔 관이, 반대쪽엔 그의 저작들이 균형추로 얹혀 실렸어요.
이 장면을 직접 목격한 사람이 있었어요.
이븐 아라비예요.
이슬람 신비주의의 대가로 훗날 "가장 위대한 스승"이라 불리게 되는 인물인데, 그 행렬을 목격했을 때 그는 30대였어요.
이븐 아라비는 자기 책에 이렇게 기록했어요.
"한쪽엔 스승이, 다른 쪽엔 그의 저작들이."
짧은 한 줄이지만, 이 기록 덕분에 우리는 그 장면을 800년 뒤에도 알 수 있어요.
알만수르가 불태우라 했던 그 책들이, 죽고 나서야 시신과 같은 말 등에 실렸어요.
주군이 없애려 했던 저작들이 그의 시신과 같은 무게로 고향으로 돌아간 거예요.

그의 아랍어 원고는 거의 사라졌어요.
그런데 라틴어 번역본은 유럽 대학에서 700년간 교과서였어요.
이슬람 세계에서 불태워지고 금지되는 동안, 유럽에서는 정반대의 일이 벌어지고 있었어요.
13세기 톨레도에서 번역가들이 이븐 루시드의 아랍어 책들을 라틴어로 옮기고 있었거든요.
톨레도는 당시 이슬람권과 기독교권이 맞닿는 도시로, 아랍어 지식이 유럽으로 건너가는 통로 역할을 했어요.
유대 학자들도 히브리어로 번역했어요.
그 번역본을 읽은 사람 중에 토마스 아퀴나스가 있었어요.
아퀴나스는 중세 가톨릭 신학의 가장 중요한 인물로, 기독교 신앙과 이성적 논증을 결합하는 방식을 정립한 사람이에요.
아퀴나스는 이븐 루시드를 이름 대신 그냥 "주석가"라는 칭호로만 불렀어요.
아리스토텔레스를 이해하고 싶으면 이 사람 것을 읽으면 된다는, 유럽 학계 전체의 암묵적 합의가 담긴 별명이에요.
하지만 단테는 한 발 더 나아갔어요.
단테는 『신곡』에서 이븐 루시드를 소크라테스·아리스토텔레스와 나란히 림보의 위대한 영혼들 사이에 그려넣었어요.
『신곡』은 단테가 저승을 직접 여행하는 중세 기독교 서사시로, 거기서 가장 지혜로운 영혼들이 머무는 자리에 이슬람 철학자가 들어간 거예요.
자신이 속한 이슬람 세계에서 이단으로 몰렸던 사람이, 기독교 유럽의 대학 강의실에서 수백 년간 읽혔어요.
책은 불탔어요.
하지만 사상은 불에 타지 않았어요.
오늘 우리가 "이성으로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고 당연하게 믿는 그 직관, 그 밑에 이븐 루시드가 있을지도 몰라요.
TTS 음성이 없어요.
아래 버튼으로 나레이션을 생성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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