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 좀 가리지 마라디오게네스
햇빛 좀 가리지 마라디오게네스
1950년대 캘리포니아의 어느 대학 강의실을 상상해 보세요.
칠판 가득 방정식이 빼곡하게 적혀 있습니다.
교수가 분필을 내려놓으며 말합니다.
"이 방정식의 해, 이론적으로는 존재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아마 없을 겁니다."
그 방정식의 해가 바로 블랙홀이었습니다.
당시 물리학자들 대부분은 블랙홀을 수학의 실수, 혹은 자연이 허락하지 않을 극단적 상상으로 여겼습니다.
아인슈타인조차 자신의 방정식이 블랙홀을 예측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실제로 존재할 리 없다"고 선을 그었습니다.
그런데 한 젊은 물리학자가 이 보이지 않는 괴물에 자신의 인생을 걸기로 합니다.
킵 손(Kip Thorne)이었습니다.
그는 왜 아무도 믿지 않는 것에 평생을 바쳤을까요?
답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방정식이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입니다.
과학자들이 말하는 '아름다움'은 예술가의 그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정말 옳은 이론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예외 없이 들어맞으며, 예상치 못한 곳까지 정확하게 관통합니다.
일반 상대성 이론의 방정식은 그런 아름다움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방정식은 블랙홀이 존재해야 한다고 소리 없이 외치고 있었습니다.
킵 손은 칼텍(캘리포니아 공과대학)에서 존 휠러(John Wheeler)의 제자가 됩니다.
휠러는 '블랙홀(black hole)'이라는 단어를 처음 대중화한 물리학자였습니다.
스승과 제자, 두 사람은 아무도 보지 못한 것을 함께 믿었습니다.
그것이 50년 후 역사를 바꿀 첫 번째 선택이었습니다.
트램펄린을 떠올려 보세요.
누군가 그 위에 볼링공을 올려놓으면 매트가 아래로 푹 꺼집니다.
그 위에 구슬을 굴리면 구슬이 직선으로 가지 않고 꺼진 쪽으로 휘어집니다.
이것이 중력의 비유입니다.
이제 볼링공 두 개가 그 위에서 빠르게 서로를 돌고 있다고 상상해 보세요.
트램펄린 매트가 파도치듯 흔들리겠죠.
그 흔들림이 바깥쪽으로 퍼져나갑니다.
중력파(gravitational wave)가 바로 그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은 1916년에 이미 중력파의 존재를 예측했습니다.
하지만 그 크기가 너무 작아서 감지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스스로 결론 내렸습니다.
태양 정도 질량의 두 별이 충돌하면서 만들어내는 중력파라도, 지구에 도달했을 때의 진동은 원자핵 직경의 수천 분의 1 수준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찾는 것도 어려운데, 원자보다도 작은 떨림을 측정하겠다고?
1980년대, 킵 손은 동료 라이너 바이스(Rainer Weiss), 배리 배리시(Barry Barish)와 함께 LIGO(라이고) 프로젝트를 시작합니다.
LIGO는 레이저 간섭계 중력파 관측소라는 긴 이름의 시설입니다.
쉽게 말하면, 레이저 빛을 이용해서 공간 자체가 얼마나 늘어나고 줄어드는지를 재는 장치입니다.
필요한 정밀도는 역사상 어떤 측정기보다도 높았습니다.
그리고 필요한 돈은 당시 기준으로 어마어마했습니다.
"세금 낭비다."
"절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그 돈으로 더 실용적인 연구를 하라."
비판이 쏟아졌습니다.
미국 의회에서도 여러 차례 예산이 삭감될 위기를 맞았습니다.
일부 물리학자 동료들조차 킵 손의 프로젝트를 회의적인 눈으로 바라봤습니다.
킵 손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왜일까요?
그는 방정식을 믿었고, 방정식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것이 그의 40년이었습니다.
2013년의 어느 날, 킵 손의 전화가 울렸습니다.
크리스토퍼 놀란(Christopher Nolan) 감독이었습니다.
"블랙홀을 정확하게 영화에 담고 싶습니다. 도와주시겠어요?"
많은 과학자라면 이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할리우드? 어차피 멋있게 왜곡할 텐데.'
하지만 킵 손은 다르게 봤습니다.
그는 평생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대중에게 설명하려 애썼습니다.
블랙홀을 실제처럼 눈 앞에 보여줄 수 있다면, 그것은 그 어떤 논문보다 강력한 설명이 될 수 있었습니다.
킵 손은 팀을 꾸렸습니다.
그는 영화 속 블랙홀 가르강튀아(Gargantua)를 만들기 위해 직접 방정식을 썼습니다.
일반 상대성 이론의 방정식을 그대로 컴퓨터 코드로 옮겼습니다.
단순한 CG 작업이 아니었습니다.
빛이 블랙홀 근처에서 어떻게 휘는지, 강착 원반(블랙홀 주위를 도는 뜨거운 가스 원반)이 어떻게 보일지, 실제 물리 법칙에 따라 한 프레임 한 프레임을 계산했습니다.
결과는 충격적이었습니다.
렌더링 팀도 놀랐습니다.
예상과 다른 모양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블랙홀 위아래로 빛이 대칭으로 휘어지는 모양, 강착 원반이 블랙홀 위에서도 보이는 기묘한 형태.
처음에는 컴퓨터가 잘못된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틀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진짜 블랙홀의 모습이었습니다.
이 시각화 작업은 나중에 두 편의 과학 논문으로 출판됩니다.
영화 특수효과가 실제 과학 연구가 된 전무후무한 사례입니다.
그리고 2014년 11월, 인터스텔라가 개봉했습니다.
킵 손은 영화관에서 울었다고 합니다.
자신이 40년 넘게 방정식 속에서만 보아온 것이, 처음으로 눈 앞에 펼쳐진 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인터스텔라 개봉 1년 뒤였습니다.
2015년 9월 14일, 새벽 5시 51분.
루이지애나와 워싱턴 주에 위치한 두 LIGO 관측소의 컴퓨터가 동시에 이상한 신호를 포착했습니다.
7밀리초 차이를 두고, 똑같은 파형이 두 곳에 나타났습니다.
과학자들은 처음에 믿지 않았습니다.
수십 년간 수없이 경보가 울렸지만 전부 잡음이었습니다.
트럭이 지나가는 진동, 지진, 바람, 심지어 근처 도로의 차량까지 다 잡아내는 시설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이번은 달랐습니다.
파형의 모양이 킵 손의 팀이 수십 년간 컴퓨터로 시뮬레이션해온 그 형태와 정확하게 일치했습니다.
태양 질량의 29배와 36배짜리 두 블랙홀이 서로 충돌하며 합쳐질 때 방출되는 중력파의 패턴이었습니다.
그 두 블랙홀은 13억 광년 떨어진 곳에서 충돌했습니다.
공룡이 지구를 걷던 시절보다 훨씬 전인 13억 년 전에 벌어진 사건의 파동이, 그날 새벽 지구를 스쳐 지나간 것입니다.
지구를 통과하는 동안 그 파동이 만들어낸 변형은 얼마나 컸을까요?
원자핵 직경의 1000분의 1이었습니다.
그것을 LIGO가 잡아냈습니다.
발표는 2016년 2월에 이루어졌습니다.
전 세계 뉴스가 이 소식을 1면에 올렸습니다.
물리학자들은 소셜 미디어에서 눈물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 킵 손은 어디 있었을까요?
그는 팀원들과 함께 발표장에 있었습니다.
40년을 기다린 사람.
40년간 '그게 될 리가 없다'는 말을 들어온 사람.
2017년, 킵 손은 노벨 물리학상을 받습니다.
시상식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우주를 눈으로만 봐왔습니다. 이제 처음으로 귀로도 듣게 되었습니다."
빛으로 볼 수 없는 블랙홀을 중력파로 '들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인류가 우주를 인식하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바뀐 날이었습니다.
킵 손의 나이는 이제 여든이 넘었습니다.
노벨상도 받았고, 영화도 만들었고, 불가능하다던 실험도 성공시켰습니다.
이제 쉬어도 될 법한데, 그는 여전히 칠판 앞에 섭니다.
이번 주제는 웜홀(wormhole)입니다.
웜홀을 이해하려면 다시 트램펄린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트램펄린 매트의 한쪽을 아래로 크게 잡아당기고, 반대쪽도 아래로 잡아당깁니다.
두 개의 긴 깔때기 모양이 생기겠죠.
만약 그 두 깔때기 끝이 이어진다면, 매트의 양 끝에서 그 터널을 통해 빠르게 이동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시공간의 지름길, 웜홀의 비유입니다.
문제는 웜홀을 만들려면 음의 에너지(negative energy)라는 기묘한 물질이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자연 속에 그런 것이 있을까요?
양자역학은 '있을 수 있다'고 힌트를 줍니다.
하지만 웜홀을 만들 만큼 충분히 있는지는 아직 모릅니다.
킵 손은 이 질문을 80년이 되어서도 놓지 않고 있습니다.
시간 여행의 이론적 가능성을 연구한 논문도 씁니다.
역설을 피하는 시간 여행의 수학적 구조가 존재하는지를 따집니다.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이 "그건 공상 과학 소설"이라고 고개를 젓는 분야에서, 그는 여전히 방정식을 씁니다.
왜일까요?
킵 손의 인생은 하나의 패턴을 반복합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포기하지 않는 것.
블랙홀도 그랬습니다.
중력파도 그랬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한 적 있습니다.
"우주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이상하다. 그리고 방정식은 그 이상함을 우리보다 먼저 알고 있다."
우리는 흔히 과학을 '이미 알려진 것들의 체계'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킵 손의 삶을 들여다보면 다른 풍경이 보입니다.
과학은 '아직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용기'로 움직여 왔습니다.
아무도 보지 못한 블랙홀을 믿었던 청년.
40년간 '돈 낭비'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레이저로 중력파를 잡겠다고 버텼던 중년.
노벨상을 받고도 웜홀 여행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는 노인.
그는 지금도 칠판 앞에 서 있습니다.
분필 가루가 날리고, 방정식이 쌓이고, 우주가 천천히 비밀을 내어놓습니다.
우리가 지금 당연하게 아는 것들은, 누군가 아무도 믿지 않을 때부터 믿어온 것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 뒤에는, 언제나 이런 질문이 있었습니다.
"방정식이 이렇게 말하는데, 왜 없다고 하죠?"
0
개
| 분류 | 제목 | 댓글 | 조회 | 작성자 | 작성일 |
|---|---|---|---|---|---|
서양철학 | 파르메니데스: 변화는 거짓이라 선언한 철학자의 실제 이야기 | 0 | 14 | 헬라스 서기관 | |
서양철학 | 헤라클레이토스: 왕위를 버리고 신전에 책을 남긴 철학자의 실제 기록 | 0 | 13 | 강가의 편집자 | |
서양철학 | 아낙시만드로스: 지구를 허공에 띄우고 최초의 세계 지도를 그린 철학자 | 0 | 12 | 고대의 서재 | |
서양철학 | 존 롤스: 동생의 죽음에서 시작된 정의론과 무지의 베일 | 0 | 11 | 공정의 서재 | |
서양철학 | 존 로크: 망명자에서 민주주의 설계자가 된 의사의 실화 | 0 | 12 | 시대의 서기관 | |
최신글 | 틱낫한: 전쟁터의 승려가 세계에 마음챙김을 전하기까지 | 0 | 13 | 고요한붓 | |
최신글 | 달라이 라마 14세: 두 살에 지목된 환생자가 걸어온 망명과 비폭력의 길 | 0 | 15 | 고원의 기록자 | |
최신글 | 밀라레파: 35명을 죽인 흑마법사가 티베트 최고의 성자가 되기까지 | 0 | 14 | 산굴의 기록자 | |
최신글 | 쫑카파 누구? 달라이 라마 전통을 만든 티베트 승려 이야기 | 0 | 15 | 고원의 길잡이 | |
최신글 | 암베드카르: 불가촉천민에서 인도 헌법의 아버지가 된 남자 | 0 | 17 | 사슬풀이 | |
최신글 | 빠드마삼바바 이야기: 연꽃에서 태어나 티베트 귀신을 굴복시킨 성자 | 0 | 17 | 연꽃서재 | |
최신글 | 마르파 로짜와 — 히말라야를 세 번 넘은 농부 번역가 이야기 | 0 | 18 | 길 위의 번역가 | |
최신글 | 감포파 — 의사에서 티베트 불교 까규파 창시자가 된 사람 이야기 | 0 | 18 | 산길따라 | |
최신글 | 킵 손 — 블랙홀을 눈에 보이게 만든 물리학자 이야기 | 0 | 19 | 별빛서재 | |
최신글 | 라마크리슈나 — 모든 종교를 직접 수행한 인도 신비가 이야기 | 0 | 17 | 강물지기 | |
최신글 | 라다크리슈난: 자기 생일을 스승의 날로 만든 철학자 대통령 이야기 | 0 | 15 | 다리놓는사람 | |
최신글 | 크리슈나무르티 — 구세주 자리를 거부한 소년의 철학 이야기 | 0 | 14 | 길없는여행자 | |
최신글 | 오로빈도 고시 — 감옥에서 깨달은 혁명가의 인류 진화론 | 0 | 17 | 빛을찾는길 | |
최신글 | 쿠마릴라 바타 — 신 없이 경전을 지킨 인도 철학자 이야기 | 0 | 16 | 빈 서재 | |
최신글 | 샨티데바 입보리행론 핵심 정리 — 1300년 전 분노 다스리기 비법 | 0 | 17 | 고요한산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