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 좀 가리지 마라디오게네스
햇빛 좀 가리지 마라디오게네스
회사에서 야근을 하고 있는데, 옆자리 동료가 슬쩍 퇴근합니다.
팀장은 못 본 척하고, 나만 바보처럼 남아 있죠.
그때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습니다.
"착하게 사는 게 무슨 소용이야, 규칙이 공평해야지."
2300년 전, 이 생각을 나라 전체에 적용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한비자.
사람을 믿지 않았고, 시스템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자기가 만든 논리에 자기가 죽었습니다.
기원전 280년경, 중국은 지옥이었습니다.
전국시대라고 불리는 이 시기에는 일곱 개 나라가 서로를 잡아먹으려 했습니다.
어제의 동맹이 오늘의 적이 되고, 아침에 악수한 손이 저녁에 칼을 쥐었습니다.
배신은 전략이었고, 충성은 바보의 증거였습니다.
한비자는 그중에서도 가장 약한 나라인 한나라의 왕족으로 태어났습니다.
왕족이라고 해서 편하게 살았을 것 같지만, 현실은 정반대였습니다.
한나라는 강대국 사이에 끼인 샌드위치 같은 나라였거든요.
언제 먹힐지 모르는 공포 속에서 자란 겁니다.
더 안타까운 건, 이 남자가 말더듬이였다는 사실입니다.
입으로는 자기 생각을 제대로 전달할 수 없었습니다.
회의 시간에 더듬거리는 동안 다른 신하들은 왕의 귀를 이미 차지하고 있었죠.
그래서 한비자는 붓을 잡았습니다.
말로 못 하면 글로 하겠다고요.
그가 대나무 위에 써 내려간 글은 놀라운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대단했냐면, 적국의 왕인 진시황이 그 글을 읽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할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적국의 왕이 팬레터를 쓸 정도였으니, 글빨 하나는 확실했던 거죠.
하지만 한비자의 글에는 한 가지 무서운 전제가 깔려 있었습니다.
사람은 믿을 수 없다.
친구도, 신하도, 심지어 가족도.
이건 비관론이 아니라, 전국시대를 살아본 사람의 생존 보고서였습니다.
자판기를 떠올려 보세요.
동전을 넣으면 음료가 나옵니다.
자판기는 당신이 착한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묻지 않습니다.
동전이라는 조건이 충족되면 음료라는 결과가 나올 뿐입니다.
한비자가 꿈꾼 나라가 정확히 이 자판기였습니다.
법을 지키면 상을 주고, 어기면 벌을 줍니다.
그 사람의 마음씨가 어떤지, 집안이 어떤지, 왕과 친한지는 전혀 상관없습니다.
오직 행동과 결과만 봅니다.
이 시스템을 한비자는 세 가지 부품으로 설계했습니다.
첫 번째는 법(法)입니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되는 규칙이죠.
왕의 친구든, 거리의 거지든, 같은 죄를 지으면 같은 벌을 받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법 앞에 만인은 평등하다"인데, 이걸 2300년 전에 주장한 겁니다.
두 번째는 술(術)입니다.
이건 왕이 신하를 관리하는 기술, 일종의 경영 전략입니다.
한비자는 왕에게 이렇게 조언했습니다.
"속마음을 드러내지 마세요. 신하가 당신의 취향을 알면, 취향에 맞춰 거짓말을 합니다."
포커 페이스의 원조가 2300년 전 중국에 있었던 셈이죠.
세 번째는 세(勢)입니다.
권력 그 자체, 지위가 주는 힘을 뜻합니다.
한비자는 말했습니다.
"용이 구름을 타서 하늘을 나는 건 용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구름이라는 세(勢) 때문이다."
아무리 뛰어난 사람도 자리에 앉히지 않으면 소용없고, 평범한 사람도 자리의 힘으로 나라를 움직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 세 가지가 맞물려 돌아가면, 왕이 낮잠을 자도 나라가 굴러갑니다.
착한 신하를 찾아 헤맬 필요 없고, 충성심을 시험할 필요도 없습니다.
시스템이 알아서 당근과 채찍을 배분하니까요.
마치 자동 운전 모드가 켜진 나라처럼요.
한비자에게는 유명한 스승이 있었습니다.
순자, 성악설의 주인공이죠.
"사람의 본성은 악하다"고 선언한 바로 그 사람입니다.
순자의 논리는 이랬습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 이기적이고 탐욕스럽다.
하지만 교육과 예절로 다듬으면 선해질 수 있다.
마치 구부러진 나무를 틀에 대고 눌러서 곧게 펴는 것처럼요.
한비자는 처음에 이 말에 고개를 끄덕였을 겁니다.
하지만 전국시대의 현실을 보면 볼수록, 의문이 커졌습니다.
교육으로 사람이 착해진다고?
그럼 왜 공자의 나라 노나라는 망했고, 예절 바른 군자들은 칼에 찔려 죽었을까?
한비자는 스승의 답을 넘어서 제3의 답을 찾아냅니다.
사람이 착하냐 악하냐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어떤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하느냐다.
비유를 하나 들어볼게요.
회사 화장실에 "손을 씻으세요"라는 표지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양심적으로 손을 씻고, 어떤 사람은 무시합니다.
순자라면 "손 씻기 교육을 강화하자"고 말했을 겁니다.
한비자는 다르게 접근합니다.
화장실 문이 손 세정제 센서를 통과해야만 열리도록 설계하면 됩니다.
착한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나가려면 손을 씻어야 하니까요.
사람의 마음을 바꿀 필요가 없습니다.
환경을 바꾸면 행동이 따라옵니다.
이건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사고방식이었습니다.
유가는 사람의 마음을 바꾸려 했고, 순자조차 교육의 힘을 믿었습니다.
한비자만이 이렇게 말한 겁니다.
"마음은 내 관할이 아닙니다. 행동만 통제하면 됩니다."
스승 순자가 이 말을 들었다면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요.
아마 서글펐을 겁니다.
교육자로서 사람의 가능성을 믿었던 노학자에게, 제자의 결론은 너무 차가웠으니까요.
여기서 잠깐, 주변을 둘러보세요.
횡단보도에서 빨간불에 건너면 벌금이 나옵니다.
보행자의 도덕성을 믿지 않고, 신호등과 벌금이라는 시스템으로 질서를 만듭니다.
한비자의 법(法)이죠.
회사에서는 성과급 제도가 있습니다.
열심히 일하면 보너스를 주고, 못하면 평가가 낮아집니다.
직원의 충성심이나 열정을 믿는 게 아니라, 숫자로 보상과 불이익을 설계합니다.
한비자의 술(術)입니다.
길거리마다 CCTV가 달려 있습니다.
"감시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착하게 행동할 거야"라고 생각하는 사회는 카메라를 달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달았죠.
이건 사실상 한비자의 전제를 받아들인 겁니다.
사람은 지켜보지 않으면 규칙을 어길 수 있다는 전제요.
더 무서운 건 신용점수 시스템입니다.
대출을 갚지 않으면 점수가 내려가고, 비행기를 못 탑니다.
당신이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 얼마나 선한 의도였는지는 관계없습니다.
시스템은 숫자만 봅니다.
한비자가 살아 있다면,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겁니다.
"내가 설계하고 싶었던 게 바로 이거야."
우리는 이미 한비자의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다만 그걸 법치주의, 제도, 시스템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뿐이죠.
2300년 전의 사상이 오늘날 이렇게 깊이 스며들어 있다는 게 놀랍지 않나요?
여기서 소름 끼치는 반전이 하나 있습니다.
한비자 자신이, 자기가 설계한 논리의 희생자가 되었다는 겁니다.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진시황이 한비자의 글에 반해 그를 진나라로 데려옵니다.
그런데 진나라에는 이미 한비자의 동문인 이사가 재상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같은 스승 밑에서 공부한 동창이자, 라이벌이었죠.
이사는 한비자가 오면 자기 자리가 위험해진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왕에게 이렇게 모함합니다.
"한비자는 한나라 왕족입니다. 절대 진나라를 위해 일하지 않을 겁니다."
진시황은 어떻게 했을까요?
한비자의 글을 그렇게 사랑했지만, 시스템의 논리대로 움직였습니다.
의심이 가는 인물은 제거하는 것이 안전하다.
감정이 아니라 이해관계로 판단하라.
이건 다름 아닌 한비자 자신의 가르침이었습니다.
결국 한비자는 감옥에 갇히고, 이사가 보낸 독약을 받습니다.
왕에게 해명할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독을 마시고 죽었습니다.
자기가 쓴 사용설명서의 규칙에 의해, 자기가 폐기된 셈이죠.
이 비극이 우리에게 묻는 질문이 있습니다.
시스템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시스템만으로 충분할까?
한비자의 시스템에는 한 가지가 빠져 있었습니다.
시스템을 운영하는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신뢰입니다.
모든 사람을 잠재적 배신자로 보면, 정말로 모든 사람이 배신의 기회를 노리게 됩니다.
의심이 의심을 낳고, 감시가 감시를 부르는 악순환이 시작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도 같은 딜레마 앞에 서 있습니다.
CCTV를 더 달 것인가, 시민의식을 더 가르칠 것인가.
성과급을 더 정교하게 설계할 것인가, 구성원의 자발성을 믿을 것인가.
정답은 아마 어느 한쪽이 아닐 겁니다.
한비자가 옳았던 부분이 있습니다.
좋은 시스템은 나쁜 사람도 올바르게 행동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순자도, 공자도 옳았던 부분이 있습니다.
시스템의 빈틈은 결국 사람의 판단으로 메워야 합니다.
2300년 전, 대나무 위에 글을 쓰던 말더듬이 철학자는 이 세상이 자기 설계도대로 돌아가는 걸 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던진 질문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사람을 믿을 것인가, 시스템을 믿을 것인가.
아니, 어쩌면 진짜 질문은 이것일지도 모릅니다.
사람도 시스템도 완벽하지 않다면, 우리는 그 불완전함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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