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 좀 가리지 마라디오게네스
햇빛 좀 가리지 마라디오게네스
개미 한 마리가 종이 위를 걷고 있다고 상상해보자.
개미는 앞뒤, 좌우로만 움직인다.
위아래라는 개념이 없다.
그 개미에게 세상은 완벽하게 평평하다.
그런데 누군가 그 종이를 몰래 둥글게 말아서 공 모양으로 만들었다면?
개미는 알아챌 수 있을까?
놀랍게도, 알 수 있다.
직접 위를 쳐다보지 않아도 된다.
개미가 삼각형을 하나 그리면 된다.
평평한 종이 위의 삼각형은 세 각도의 합이 정확히 180도다.
이건 우리가 초등학교 때부터 배운 사실이다.
그런데 축구공 표면 위에 삼각형을 그리면?
세 각도를 다 더하면 180도보다 크다.
심지어 270도가 나오기도 한다.
공간의 곡률이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으로 넘어오면 이야기가 더 흥미로워진다.
우리는 3차원 공간에 산다.
앞뒤, 좌우, 위아래.
그리고 우리는 오랫동안 이 공간이 완벽하게 평평하다고 생각했다.
눈금이 똑같이 나뉜 바둑판처럼, 우주 어디를 가도 공간은 균일하고 납작하다고.
이 믿음은 유클리드가 기원전 300년에 정리한 이후 2000년 동안 흔들리지 않았다.
직선은 직선이고, 평행선은 영원히 만나지 않는다.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 의심을 처음으로 품은 사람이 있었다.
수줍음 많은 독일 목사의 아들이었다.
1826년, 독일의 작은 마을 브레젤렌츠에서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베른하르트 리만이 태어났다.
아버지는 루터교 목사였다.
가난했다.
여섯 남매가 작은 목사관에 옹기종기 모여 살았다.
어머니는 리만이 열네 살 때 세상을 떠났다.
리만은 어릴 때부터 유독 조용한 아이였다.
발표를 하면 손이 떨렸다.
낯선 사람 앞에 서면 말문이 막혔다.
오늘날로 치면 극심한 사회불안장애였다.
그런데 책 앞에서만은 달랐다.
열네 살 때 학교 선생님이 리만에게 책 한 권을 빌려주었다.
프랑스 수학자 르장드르가 쓴 정수론 교재였다.
두께가 무려 800쪽이었다.
선생님은 "천천히 읽어봐"라고 했다.
리만은 엿새 만에 다 읽고 돌아왔다.
선생님이 물었다.
"다 읽었어?"
리만이 조용히 대답했다.
"네. 훌륭한 책이었어요."
선생님이 반신반의하며 아무 페이지나 펼쳐 질문을 던졌다.
리만은 막힘없이 답했다.
다른 페이지도, 또 다른 페이지도.
선생님은 그날 이후 리만에게 더 이상 가르칠 게 없다는 걸 알았다.
아버지는 아들이 신학자가 되길 원했다.
리만도 처음엔 그 뜻을 따르려 했다.
괴팅겐 대학에 들어가서도 신학 수업을 들었다.
하지만 수학 강의가 하나둘 그를 끌어당겼다.
결국 아버지에게 편지를 썼다.
"수학을 하고 싶습니다."
아버지는 허락했다.
그 허락이 세상을 바꿨다.
괴팅겐에는 당대 최고의 수학자가 있었다.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
수학의 왕이라 불리던 사람이었다.
리만은 그 앞에 서기 위해 모든 것을 준비했다.
1854년 6월 10일.
리만의 나이 스물일곱.
그날 리만은 교수 자격을 얻기 위한 강연을 해야 했다.
제목은 이랬다.
"기하학의 기초를 이루는 가설들에 대하여."
강의실에는 교수들이 앉아 있었다.
맨 앞자리에는 일흔여섯 살의 가우스가 있었다.
리만의 손이 떨렸을 것이다.
늘 그랬으니까.
하지만 그가 꺼낸 아이디어는 조용한 목소리와 달리 폭발적이었다.
"공간 자체가 구부러질 수 있다."
2000년 동안 당연했던 것을 뒤집는 말이었다.
풍선을 생각해보자.
바람을 불어넣기 전 납작한 풍선.
그 위에 개미가 살면 세상이 평평하다.
바람을 불어넣으면?
공간 자체가 구부러진다.
개미는 올려다보지 않아도 삼각형 각도가 달라졌다는 걸 느낄 수 있다.
리만의 질문은 이거였다.
"우리 우주도 이 풍선처럼 구부러져 있을 수 있지 않을까?"
더 나아가 그는 말했다.
공간의 곡률은 장소마다 다를 수 있다.
어떤 곳은 볼록하고, 어떤 곳은 오목하고, 어떤 곳은 안장 모양일 수도 있다.
균일한 바둑판이 아니라, 구겨진 이불 같은 공간.
이걸 수학으로 기술하기 위해 리만은 완전히 새로운 도구를 만들었다.
리만 계량 텐서.
어떤 복잡한 형태의 공간이든, 그 공간에서 두 점 사이의 거리를 계산하는 방법.
트램펄린을 상상하면 쉽다.
아무도 없으면 트램펄린은 평평하다.
볼링공을 올려놓으면?
표면이 쑥 꺼진다.
그 위에서 구슬을 굴리면 구슬은 볼링공 쪽으로 휘어져 굴러간다.
볼링공이 구슬을 잡아당긴 게 아니라, 공간이 휘어서 구슬이 휜 것이다.
45분 강연이 끝났다.
교수들은 조용했다.
그런데 가우스가 일어났다.
가우스는 강연 후에 뭔가를 칭찬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그는 동료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오늘 뭔가 완전히 새로운 것을 들었다."
수학의 왕이 인정했다.
하지만 세상은 아직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
리만은 평생 병약했다.
폐결핵이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1866년, 서른아홉의 나이로 이탈리아 마조레 호수 근처에서 눈을 감았다.
그의 논문은 많지 않았다.
남긴 글도 얇았다.
세상은 그를 금방 잊어버릴 것 같았다.
그런데 60년 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리만의 기하학을 손에 들었다.
아인슈타인은 이미 특수상대성이론을 발표한 상태였다.
빛의 속도는 항상 같다.
시간은 절대적이지 않다.
여기까지는 알았다.
그런데 중력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뉴턴은 말했다.
"물체가 서로 잡아당긴다."
하지만 왜? 어떻게? 빈 공간을 가로질러?
아인슈타인이 새로운 그림을 그렸다.
지구가 태양 주변의 공간 자체를 구부린다.
달은 태양에 이끌리는 게 아니라, 구부러진 공간의 가장 자연스러운 경로를 따라가는 것이다.
이게 일반상대성이론의 핵심이다.
그리고 이 그림을 수학으로 표현하려면?
딱 하나의 언어가 필요했다.
리만의 기하학이었다.
아인슈타인은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리만의 수학이 없었다면 자신의 이론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트램펄린 비유로 다시 돌아가자.
태양은 트램펄린 한가운데 놓인 볼링공이다.
지구는 그 주변을 도는 구슬이다.
볼링공이 트램펄린을 구부리고, 구슬은 그 구부러진 곡면을 따라 빙빙 돈다.
중력은 힘이 아니라 공간의 곡률이다.
한 수줍은 청년이 교수들 앞에서 떨리는 손으로 그렸던 그림이, 60년 뒤 우주의 언어가 된 것이다.
오늘 아침 스마트폰으로 지도를 켰을 것이다.
내비게이션이 현재 위치를 찍어준다.
몇 초 안에.
오차는 수 미터 이내.
이게 가능한 이유는 GPS 위성 덕분인데, GPS 위성에는 아주 정밀한 시계가 달려 있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위성은 지구 상공 2만 킬로미터에서 빠르게 움직인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따르면 빠르게 움직이는 시계는 느려진다.
또 지구 중력이 약한 곳에서는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
이 두 효과를 합치면 GPS 위성의 시계는 하루에 약 38마이크로초 어긋난다.
보정하지 않으면 하루에 10킬로미터 이상 오차가 난다.
GPS는 리만 기하학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으로 매 순간 시간을 보정하고 있다.
당신이 카카오맵을 켤 때마다, 배달 음식을 주문할 때마다, 리만의 공간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더 먼 우주를 보자.
2019년 4월, 인류 최초로 블랙홀 사진이 공개됐다.
지구에서 5500만 광년 떨어진 은하 중심의 블랙홀.
그 주변의 빛이 구부러지는 모습.
그 빛이 휘어지는 정확한 경로를 계산하는 데 사용된 수학이 리만 기하학이었다.
2015년에는 중력파가 처음으로 검출됐다.
두 블랙홀이 충돌하면서 공간 자체가 출렁인 파동.
리만이 상상한 "구부러지는 공간"이 진짜로 파도를 친다는 증거.
그 파동을 예측한 방정식도, 검출 방법을 설계하는 데 쓴 기하학도 리만에서 시작됐다.
리만의 이름이 붙은 게 하나 더 있다.
리만 가설.
소수의 분포를 설명하는 미해결 문제.
1859년에 제기됐고, 아직 아무도 풀지 못했다.
이 문제가 풀리면 암호 체계가 흔들릴 수도 있다.
우리가 쓰는 인터넷 보안, 은행 거래, 암호화폐가 소수의 규칙성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아직 풀리지 않았다는 게 오히려 현재의 암호 시스템이 안전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리만은 평생 발표가 두려웠다.
낯선 사람 앞에 서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서른아홉에 일찍 세상을 떠났다.
유명한 척하지 않았고, 많은 글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조용히 상상한 "구부러진 공간"이 지금 이 순간에도 위성을 보정하고, 블랙홀을 찍고, 우주의 파동을 듣고, 당신의 지도를 켜고 있다.
가장 조용한 사람이 가장 큰 혁명을 일으킨다.
리만은 그 사실을 몸으로 증명했다.
말이 아니라 상상으로.
목소리가 아니라 아이디어로.
그리고 그 상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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