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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산타야나의 '동물적 신앙(animal faith)'은 세계와 미래, 다른 사람이 진짜 있다는 걸 증명하기 전에 이미 믿고 살아가는 본능적 태도예요. 지식이 이 믿음을 떠받치는 게 아니라, 이 믿음 위에 우리의 모든 지식과 판단이 세워집니다.
배가 고파서 냉장고 문을 열 때, 우리는 "저 안에 진짜 음식이 있을까? 이 세계가 정말 존재할까?"를 따지지 않아요.
그냥 문을 열고 꺼내 먹지요.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태어나 미국 하버드에서 가르친 철학자 조지 산타야나(1863년부터 1952년까지)는 바로 이 순간에 숨어 있는 믿음에 이름을 붙였어요.
그는 이렇게 적었어요.
"that there is a world, that there is a future, that things sought can be found, and things seen can be eaten."
우리말로 옮기면 "세계가 있다는 것, 미래가 있다는 것, 찾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 눈에 보이는 것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에요.
이렇게 증명하지 않고도 몸으로 이미 받아들이는 원초적 확신을 그는 '동물적 신앙(animal faith)'이라고 불렀어요.
지식이 먼저 있고 믿음이 뒤따르는 게 아니라, 이 믿음이 먼저 있어야 지식도 시작된다는 거예요.
산타야나는 1923년에 낸 『Scepticism and Animal Faith』(회의주의와 동물적 신앙)에서 아주 독한 실험을 해요.
데카르트보다도, 흄이나 칸트보다도 더 철저하게 의심하는 거예요.
"내 자아가 진짜 있나? 과거는? 미래는? 바깥 세계는?"
이렇게 하나씩 지워 나가면, 결국 지금 이 순간의 느낌 말고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는 막다른 곳에 이르러요.
산타야나는 이 극단을 '현재 순간의 유아론(solipsism of the present moment)'이라고 불렀어요.
그런데 여기서 멈추면 밥도 못 먹고 길도 못 건너요.
그래서 그는 철학이 '사물의 한가운데서(in medias res)', 즉 살아가는 행동 속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봤어요.
그 재출발의 발판이 바로 동물적 신앙이에요.
회의는 목적지가 아니라 도구였던 셈이지요.
그의 유명한 말이 이 태도를 잘 보여줘요.
"Scepticism is the chastity of the intellect, and it is shameful to surrender it too soon."
"회의주의는 지성의 순결이며, 그것을 너무 일찍 넘겨주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라는 뜻이에요.
끝까지 의심해 보되, 결국 세계를 인정하며 삶으로 돌아온다는 거예요.
'신앙'이라는 말 때문에 하늘이나 신을 믿는 것과 헷갈리기 쉬워요.
하지만 산타야나가 말한 건 초자연적인 대상이 아니라, 세계와 시간과 타인이 진짜 있다고 인정하는, 생존에 꼭 필요한 태도예요.
무신론자였던 그가 말한 '동물적'도 '무지하게 믿는다'는 비하가 아니라, 모든 살아 있는 것이 살기 위해 반드시 깔고 가는 바탕이라는 중립적 뜻이에요.
| 구분 | 동물적 신앙 | 흔한 오해(종교적·맹목적 믿음) |
|---|---|---|
| 믿는 대상 | 세계·미래·타인의 실재 | 초자연적 존재 |
| 성격 | 행동에 필요한 본능적 바탕 | 특정 교리를 믿고 따름 |
| '동물적'의 뜻 | 모든 생명의 인식 토대(중립) | 무지한 맹신(비하) |
중요한 점이 하나 더 있어요.
이 믿음들은 확률 계산 뒤에 나오는 게 아니에요.
오히려 반대예요.
세계가 있다고 먼저 믿기 때문에 우리는 '이 일이 일어날 확률이 높다'는 판단도 할 수 있어요.
모든 개연성 판단이 이 믿음 위에 얹혀 있는 거예요.
그럼 냉철한 이성은 동물적 신앙과 반대편에 있을까요?
산타야나는 아니라고 해요.
"reason is only a form of animal faith... like the chirping of birds."
"이성이란 동물적 신앙의 한 형태일 뿐이며, 마치 새들의 지저귐처럼 유쾌한 확신으로 가득 차 있다"는 거예요.
논리도 결국 세계가 있다는 믿음 위에서만 돌아가니까요.
그래서 동물적 신앙을 비판하는 사람도 실은 그 믿음으로 숨 쉬고 먹고 말하고 있어요.
비판하는 그 순간에도 세계가 있다고 전제하니까요.
그러니 철학이 할 일은 이 근본 믿음을 억지로 '정당화(justify)'하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 '기술(describe)'하는 것이라고 그는 봤어요.
훗날 비트겐슈타인이 『확실성에 관하여』에서 뿌리 믿음을 '동물적'이라고 부른 것과도 통하는 생각이에요.
우리는 아침마다 증명 없이 하루를 시작해요.
버스가 올 거라고, 친구가 진짜 존재한다고, 내일이 있을 거라고 믿고 움직이지요.
산타야나는 이걸 부끄러워할 게 아니라 삶의 정직한 출발점으로 보라고 말해요.
끝까지 의심해 본 사람만이, 그 의심 너머에서 세계를 다시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거예요.
참고로 이 책은 그의 최종 결론이 아니라 이후 네 권짜리 『The Realms of Being』(1927년부터 1940년까지)의 서론으로 쓰였다는 점도 기억해 두면 좋아요.
동물적 신앙은 세계·미래·타인이 실재한다는 걸 증명 이전에 이미 믿고 살아가는 본능적 태도예요.
산타야나는 회의를 극한까지 밀어붙였다가 삶의 행동으로 돌아오며 이 믿음을 받아들였어요.
그것은 종교적 맹신이 아니라 모든 생명의 인식 바탕이고, 이성조차 그 한 형태일 뿐이에요.
그러니 앎이 믿음을 떠받치는 게 아니라, 이 믿음 위에 앎이 세워진다는 것 하나만 기억하면 충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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