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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는 덕이면 충분하다안티스테네스
슬로터다이크가 말한 냉소는 세상을 몰라서가 아니라 다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는 마음이에요. 진실을 배웠지만 '어차피 다 그런 거지' 하며 행동을 미루니, 어떤 비판도 그 마음을 더는 찌르지 못하죠.
건강에 나쁘다는 걸 알면서 야식을 시키고, 환경이 망가진다는 걸 알면서 일회용 컵을 쓰죠.
뭔가 잘못됐다는 건 다 아는데도 몸은 어제처럼 움직여요.
독일 철학자 피터 슬로터다이크가 1983년에 낸 책 『냉소적 이성 비판(Kritik der zynischen Vernunft)』은 바로 이 마음을 겨눠요.
그는 근대의 냉소(독일어로 치니스무스, Zynismus)를 '계몽된 허위의식'이라고 불렀어요.
무식해서 속고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다 배우고 다 아는데도 그 앎을 실천으로 옮기지 못하는 의식이라는 뜻이에요.
잘 살면서 동시에 불행하고, 어떤 비판을 들어도 '나도 알아' 하며 이미 마음에 완충장치를 깔아 둔 상태죠.
이 책은 20세기에 가장 많이 팔린 철학책 중 하나로 꼽힐 만큼 널리 읽혔어요.
예전의 비판은 이렇게 작동한다고 믿었어요.
사람들이 거짓을 진실로 착각하고 있으니, 진짜를 보여 주면 눈을 뜨고 바뀔 거라고요.
마치 마술의 속임수를 알려 주면 더는 안 속듯이 말이에요.
그런데 슬로터다이크가 본 근대인은 이미 속임수를 다 알고 있어요.
광고가 과장이라는 것도, 정치가 말과 다르다는 것도 훤히 알아요.
그러면서도 '세상이 원래 그렇지' 하며 그냥 살아가요.
그러니 '진실을 봐라' 하고 아무리 외쳐도 그 말이 미끄러져 튕겨 나가요.
냉소는 진실 앞에서 반사적으로 방어막을 치고 있으니까요.
오래된 방식의 비판이 왜 힘을 잃었는지를 짚은 것이 이 책의 출발점이에요.
재미있게도 슬로터다이크는 근대의 냉소를 비판하면서, 옛날 그리스의 '견유주의(키니스무스, Kynismus)'를 대안으로 꺼내요.
원래 그리스어 쿠니코스(kunikos)의 'K'가 근대로 오면서 'C'로 바뀐 그 작은 자음 변화 속에, 정신의 큰 변질이 숨어 있다고 본 거죠.
| 구분 | 고대 견유주의(Kynismus) | 근대 냉소주의(Zynismus) |
|---|---|---|
| 방식 | 몸으로 직접 저항 | 말과 태도로 비웃기 |
| 태도 | 권력을 조롱하는 힘없는 이들의 숨구멍 | 다 알면서도 체제에 순응 |
| 대표 | 통 속의 디오게네스 | 계몽된 허위의식 |
대표 인물은 디오게네스예요.
대낮에 등불을 들고 다니거나, 시장 한복판에서 아무렇지 않게 볼일을 보고 몸을 만지기도 했죠.
슬로터다이크는 이런 행동을 점잖은 척하는 세상을 향한 '이성의 이른 절정'이라 불러요.
머리로 논쟁하는 대신 몸 자체가 비판을 수행하는 '모델 상황'인 셈이에요.
근대 냉소가 '알아도 가만있기'라면, 고대 견유는 '알면 몸으로 들이받기'인 거죠.
여기서 흔한 오해 하나를 풀어야 해요.
슬로터다이크는 자주 '냉소주의자'로 불리지만, 사실은 정반대예요.
그는 냉소를 옹호한 게 아니라 냉소를 해부하고, 그 대신 디오게네스식 저항을 내밀었어요.
그를 냉소의 편으로 읽는 건 오독이에요.
우리 일상으로 옮겨 볼까요.
'어차피 세상은 안 바뀌어' 하는 말은 똑똑해 보이지만, 실은 알면서 아무것도 안 하려는 핑계일 수 있어요.
슬로터다이크의 물음은 이거예요.
다 아는 당신은, 그 앎으로 무엇을 하고 있나요.
말로 비웃는 자리에서 내려와, 삶으로 살짝이라도 응답할 수 있나요.
슬로터다이크가 말한 냉소는 몰라서가 아니라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는 '계몽된 허위의식'이에요.
그래서 '진실을 봐라'라는 옛 비판은 이미 다 아는 사람에게 튕겨 나가죠.
그가 내민 대안은 통 속 디오게네스처럼 말이 아니라 몸으로 저항하는 고대의 견유주의였어요.
다음에 '어차피 안 돼'라는 말이 입에 맴돌 때, 그게 냉정한 판단인지 아니면 알면서 멈춰 선 냉소인지 한 번 되물어 보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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